근사록 01 도체(道體)

근사록(近思錄) · 송 주희·여조겸 · 번역·감수 허유

《근사록(近思錄)》은 남송 순희 2년(1175)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함께 편정한 성리학 입문서로, 주돈이(주자)·정호(명도)·정이(이천)·장재(횡거) 네 선생의 글 가운데 일용(日用)에 절실한 것을 가려 14문(門)으로 나누었다. 권1 「도체(道體)」는 모두 51조로, 성(性)의 본원과 도(道)의 본체를 논하니, 학문의 강령(綱領)이 된다. 본문에는 엽채(葉采)의 집해(集解) 주석이 (주: …) 형태로 섞여 있다.

번역

도체(道體) (주: 모두 51조이다.)

이 권은 성(性)의 본원과 도(道)의 본체를 논하니, 대개 학문의 강령이다.

1. 염계 선생(주돈이)이 말하였다.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주: 이는 주자(周子, 주돈이)가 《주역》에 '역(易)에 태극이 있다'는 말이 있음에 인하여 도체의 본원을 묵묵히 깨달아, 상(象)을 세워 뜻을 다하고 다시 설(說)을 지어 그 깊은 뜻을 밝힌 것이다. 무극은 다만 그 형체 없음을 말하고, 태극이란 크되 다시 더할 것이 없는 지극한 이치이다. 이른바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나' 텅 비고 막막하여 조짐이 없는 가운데 만상(萬象)과 만화(萬化)가 빽빽이 이미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대개 본래 찾을 만한 형적(形迹)이 없으나 실은 조화(造化)의 중심축이요 만물의 뿌리이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동이 지극하면 정(靜)해진다. 정하여 음(陰)을 낳고, 정이 지극하면 다시 동한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함이 서로 그 뿌리가 되며,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선다. (주: 태극이란 이(理)이니, 이가 있으면 곧 기(氣)가 있고, 기가 있으면 그 기틀이 드러난다. 기틀이 한 번 동하면 곧 양이 되니 이것이 태극의 동이며, 이미 양을 낳은 것이다. 동에는 끝까지 동하기만 하는 이치가 없으므로 동이 지극하면 정해지고, 기틀이 한 번 정하면 곧 음이 되니 이것이 태극의 정이며 음을 낳은 것이다. 정에도 끝까지 정하기만 하는 이치가 없으므로 정이 지극하면 다시 동한다. 무릇 동이 지극하여 정해지니 이는 동이 한결같이 동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어서 곧 정의 뿌리가 되며, 정이 지극하여 다시 동한다. 음은 음의 경계가 있으니 나뉘어 음이 되고, 양은 양의 경계가 있으니 나뉘어 양이 된다. 그리하여 음의(陰儀)와 양의(陽儀) 둘이 서로 마주 대하여 선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화·목·금·토를 낳는다. 다섯 기운이 차례로 펴져 사시(四時)가 운행한다. (주: 음양이 이미 나뉘고 양의가 이미 서면, 그 가운데서 마침내 서로 사귀지 않을 수 없어 생성의 작용이 드러난다. 양이 음으로 나아가면 베풂을 주장하여 변(變)이 되고, 음이 양을 맞으면 받음을 주장하여 합(合)이 된다. 이에 양이 한 번 변하여 수를 낳고 음이 육(六)으로 합하여 이루며, 음이 둘로 합하여 화를 낳고 양이 칠(七)로 변하여 이루며, 양이 셋으로 변하여 목을 낳고 음이 팔(八)로 합하여 이루며, 음이 넷으로 합하여 금을 낳고 양이 구(九)로 변하여 이룬다. 금·수의 다섯 기운이 마침내 천지 사이에 차례로 펴져, 목기는 봄에 운행하고 화기는 여름에 운행하며 금기는 가을에, 수기는 겨울에 운행하고 토기는 사계(四季)에 붙어 운행하니, 사시가 운행하여 차례로 펴짐에 또한 자연한 질서가 있다.)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주: 오행에 이미 생성하고 차례로 펴지는 묘함이 있으니, 조화가 발육하는 도구가 뒤섞이고 변화하여 끝이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미루어 말하면, 오행이 비록 맑고 흐림의 바탕은 다르나 바탕이 음양을 벗어나지 않고, 먼저와 나중의 때는 다르나 때가 음양을 벗어나지 않으며, 이쪽과 저쪽의 자리는 다르나 자리가 음양을 벗어나지 않는다. 미루어 보매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라는 것이다. 음양이 흩어져 나타남이 비록 어떤 물건에도 있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에도 그렇지 않음이 없으나, 실은 곧 태극의 동정(動靜)이니 이것이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라는 것이다. 태극이 그러한 까닭에 이르러서는 그 이(理)가 있을 뿐, 애초에 들을 만한 소리나 냄새도 없고 볼 만한 형상도 없으니, 이것이 태극은 본래 무극이라는 것이다.) 오행이 생겨남에 각기 그 성(性)을 하나씩 가진다. (주: 오행은 본래 똑같이 태극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생겨남에 이루어진 바탕이 있으면 이(理)가 기질(氣質)을 따라 갖추어져 길이 각기 하나에 오로지하여 그 성을 이룬다. 가령 목은 곡직(曲直)을 성으로 삼고, 화는 염상(炎上)을 성으로 삼으며, 금은 종혁(從革)을 성으로, 수는 윤하(潤下)를 성으로, 토는 가색(稼穡)을 성으로 삼으니, 이것이 오행이 각기 하나의 태극을 갖추어 성이 어떤 물건에도 있지 않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무극의 진(眞)과 음양·오행의 정(精)이 묘하게 합하여 응결한다. 건(乾)의 도는 남자를 이루고 곤(坤)의 도는 여자를 이루며, 두 기운이 사귀어 감응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한다. 만물이 끊임없이 낳고 낳아 변화가 무궁하다. (주: 오행이 비록 각기 하나의 성을 가지나 그 근본은 실로 무극에서 나왔다. 대개 무극은 본래 실제로 있는 이치이니 이른바 진(眞)이다. 두 기운과 오행에 이르러서는 이(理)를 싣고 나오매 그 가운데 순수한 기 아님이 없으니 이른바 정(精)이다. 진실한 이치와 정순한 기가 모임에 묘하여 응결해 형체를 이룬다. 그리하여 그 양의 굳센 것이 건의 도임을 보니 실로 남자를 이루어 부도(父道)가 서고, 음의 순한 것이 곤의 도이니 실로 여자를 이루어 모도(母道)가 선다. 이에 이가 기를 주재하여 두 기운이 뒤섞이고 변화하여 만물을 낳으니, 사람과 만물이 기로써 생기는 것은 본래 이기(理氣)의 진정(眞精)의 묘함을 얻은 것이어서 만물이 똑같이 태극에서 나왔다. 이미 기가 화하여 형체를 이루고는 만물이 마침내 각기 형기(形氣)로써 사귀어 감응하여 낳고 낳아 그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양이 변하고 음이 화하여 다함이 없으니 이는 사람과 만물이 형체로 화하여 생기는 것이다. 또 각기 이기의 진정의 묘함을 얻으니 만물이 각기 하나의 태극을 가진다. 무릇 합하여 말하면 만물이 한 몸으로 하나의 태극이요, 나누어 말하면 만물이 각기 한 몸으로 하나의 태극이니, 곧 사물이 성을 떠날 수 없고 성이 가는 곳마다 각기 족함이 또한 크게 드러나 분명하지 아니한가.)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남을 얻어 가장 신령하다. 형체가 이미 생기고 신(神)이 앎을 발한다. 다섯 가지 성(性)이 감동하여 선악이 나뉘고 만사(萬事)가 나온다. 성인이 이를 중정인의(中正仁義)로 정하고 정(靜)을 주장하여 인극(人極)을 세운다. (주: 이는 윗글을 이어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되나, 보통 사람은 사물로 인하여 옮겨지므로 성인의 가르침이 서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만물이 비록 똑같이 태극을 갖추고 똑같이 그 성을 가지나, 사람은 천지의 빼어남을 얻어 마음이 홀로 뭇 사물보다 신령하다. 음이 모여 형체를 이룬 것은 이미 생겨나 그 바탕이 있고, 양이 운행하여 신이 된 것은 또 발하여 그 앎이 있다. 이에 인의예지신 다섯 가지 성이 감동하여 움직이매, 혹 의리의 바름을 얻어 양명(陽明)으로 나아가 선이 되고, 혹 혈기의 치우침을 따라 음암(陰暗)으로 들어가 악이 되니, 선악이 이로부터 나뉘고 일을 만나고 사물을 접하매 만 가지로 변하여 같지 않으니 만사가 이로부터 나온다. 이를 정함이 없으면 정성(情性)이 흔들려 금수와 다른 점이 거의 드물어진다. 다행히 성인이 나와 기질이 청명하여 더욱 빼어남 중의 빼어남이 되니, 이에 사람이 똑같이 이 성을 지니고 성이 똑같이 이 이치를 지님을 생각한다. 이에 도를 닦아 가르침을 삼아 큰 중(中)의 예(禮), 지극히 바른 지(智), 차마 못하는 인(仁), 마땅함에 합한 의(義)로써 정하였다. 무릇 이것이 모두 태극을 온전히 체득하여 동정의 구분이 없으니, 그 동하는 곳도 반드시 정한 듯하여야 음양이 덕을 합하고 성의 분량에 어그러짐이 없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정을 주장하여 인극이 이로 인해 선다. 그렇다면 똑같이 동정의 이치를 갖추었으되 보통 사람은 동에서 잃는 자이고, 성인은 동에서도 정하고 정에서도 정한 것으로 인극을 세워 천하의 움직임을 하나로 하니, 그 자기를 이루고 사물을 이루는 공이 또한 얼마나 큰가.)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을 합하고, 일월과 그 밝음을 합하며, 사시와 그 차례를 합하고,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한다. (주: 윗글을 이어, 성인이 태극을 온전히 체득하여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침이 혼연한 천리(天理)여서 어디를 가도 합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덮고 싣는 것은 천지의 덕인데 성인의 도덕이 그 광대함과 합하고, 빛나는 것은 일월의 밝음인데 성인의 슬기로움이 그 비춤과 합하며, 사시가 갈마드는 것은 그 차례를 밝히는 것인데 성인이 이와 합하여 변통이 모두 자연에서 나오고, 귀신의 화복은 그 길흉을 드러내는 것인데 성인이 이와 합하여 드러냄과 막음이 모두 지당함으로 돌아가니, 이로써 그 가운데 자리를 이루어 음양 동정의 이치가 곧장 위아래로 더불어 함께 흐른다.) 군자는 이를 닦아 길하고 소인은 이를 거슬러 흉하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의 도를 세움은 음과 양이요, 땅의 도를 세움은 유(柔)와 강(剛)이며, 사람의 도를 세움은 인과 의이다." 또 말하기를 "시작을 미루어 끝으로 돌아가므로 생사(生死)의 설(說)을 안다." (주: 이는 태극의 이치가 유독 성인만이 온전히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곧 인품이 나뉘는 바요 길흉이 매인 바이며, 삼재(三才)를 겸하는 것도 오직 이것이요 생사를 꿰뚫는 것도 오직 이것임을 말한 것이다. 무릇 성인은 정을 주장하여 극(極)을 세우니 본래 생각하지 않고도 힘쓰지 않고도 태극을 온전히 체득하여 동정의 순환이 모두 종용히 중정인의의 도에 맞는다. 이같이 하지 못하면 반드시 이를 닦아 경(敬)과 의(義)를 함께 세워 덕을 닦음이 날로 아름다우니 군자가 길한 까닭이다. 이것이 있음을 모르면 서로 더불어 거슬러 욕심을 멋대로 하여 망령되이 행하고 거짓을 지음이 날로 졸렬하니 소인이 흉한 까닭이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다만 경(敬)과 사(肆, 멋대로 함)에 있을 뿐이니, 사람이 힘써 경을 지녀 정에서는 비고 동에서는 곧게 하여 성인의 학문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인이 삼재의 도를 겸하고 생사의 설을 통할 수 있는 까닭은 다만 실제로 태극의 도리를 체득함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역》 「설괘전」에 '하늘의 도를 세움은 음과 양'이라 하니 음양은 태극이 상(象)을 이룬 것이요, '땅의 도를 세움은 유와 강'이라 하니 유강은 태극이 바탕을 이룬 것이며, '사람의 도를 세움은 인과 의'라 하니 인의는 태극이 덕을 이룬 것이다. 가는 곳마다 드러나 삼재가 되나 모두 하나의 태극이다. 「계사전」에 '시작을 미루어 끝으로 돌아가므로 생사의 설을 안다'고 하니, 본래의 시작을 미루어 거슬러 올라감은 곧 신(神)의 펴짐이나 또한 다만 양이요 인일 뿐이니 태극의 동이 그렇게 한 것이요, 그 끝을 돌이켜 봄은 곧 귀(鬼)의 돌아감이나 오히려 음이요 유요 의일 뿐이니 태극의 정이 그렇게 한 것이다. 사람이 이를 능히 겸하여 익히면 삼재가 갖추어져 참찬(參贊)이 나에게 있고, 생사를 순순히 받아 조화에 어김이 없으니 길흉은 또 말할 것이 못 된다.) 위대하다 역(易)이여, 이것이 그 지극함이로다. (주: 이 그림이 곧 역의 까닭을 밝힌 것임을 맺어 말한 것이다. 대개 광대하게 모두 갖춘 것은 역의 책이요, 이 그림은 곧 역 가운데 지극히 미묘하여 말로 다하기 어렵고 다시 더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그 상을 그리고 다시 설을 지었으니 사람에게 보이는 뜻이 더욱 깊고 절실하다.)

2. 염계가 말하였다. "성(誠)은 작위함이 없고, (주: 이는 주자가 사람으로 하여금 천리를 온전히 다하게 하고자 하여 먼저 미발(未發)의 본체를 가리켜 사람으로 하여금 본연의 지극한 선을 알게 한 것이다. 성(誠)이란 진실무망(眞實無妄)을 이르며, 무위(無爲)란 실제의 이치가 자연하여 인위(人爲)에 관계되지 않음이다. 대개 사람이 나서 고요할 때 이 이치가 진실무망하니 무슨 작위가 있겠는가.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가운데 다만 혼연한 지극한 선을 느낄 뿐이니, 능히 최초의 고요한 바름을 지키면 곧 천지의 온전한 사람이니 이것이 곧 태극이다.) 기미[幾]에 선악이 있다. (주: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움직임을 삼가게 하고자 함이다. 기(幾)란 움직임의 미묘함이다. 자연히 발하면 선이 되고 한 번 섞임이 있으면 곧 악이 되니, 그 단서가 매우 미묘하여 분별함을 일찍 함이 귀하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 움직임이 없을 수 없으니 한 번 움직이면 천리가 이로부터 드러나고 인욕(人欲)도 이로부터 몰래 싹튼다. 이른바 '도심(道心)은 미묘하고 인심(人心)은 위태롭다'는 것이다. 이는 음양의 상이다.) 덕(德)으로 사랑함을 인(仁)이라 하고, 마땅함을 의(義)라 하며, 이치를 예(禮)라 하고, 통함을 지(智)라 하며, 지킴을 신(信)이라 한다. (주: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性) 가운데 갖춘 이치를 알아 다하게 하고자 함이다. 도를 몸에 얻음을 덕이라 하니, 대개 기미가 비록 선악의 구분이 있으나 선은 곧 성 가운데 본연의 이치가 발현된 것이니, 이미 몸에 얻으면 체(體)와 용(用)을 알 수 있다. 체는 볼 수 없으니 용에서 본다. 그 마음의 측은히 여겨 능히 사랑함에서 인의 이치를 지목하여 이름할 수 있고, 마음의 재제(裁制)가 마땅함에서 의의 이치를 지목할 수 있으며, 마음의 질서에 조리가 있음에서 예의 이치를 지목할 수 있고, 마음이 밝고 슬기로워 능히 두루 통함에서 지의 이치를 지목할 수 있으며, 마음이 확실하여 지킴이 있음에서 신의 이치를 지목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오행의 성이다.) 본성대로 하고 편안히 함을 성(聖)이라 하고, (주: 본성대로 함은 하늘을 홀로 넉넉히 얻음이요, 편안히 함은 스스로 천리를 온전히 함이니, 성(聖)이란 커서 화(化)함을 이른다. 대개 사람이 똑같이 이 성을 지니고 똑같이 이 기미를 지니며 똑같이 이 덕을 지닌다.) 돌이키고 잡음을 현(賢)이라 한다. 발함이 미묘하여 볼 수 없고 채워 두루 함이 다할 수 없음을 신(神)이라 한다."

3. 이천(정이)이 말하였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하지 않음을 중(中)이라 한다." 중이란 '적연부동(寂然不動)'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큰 근본'이라 한다.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음을 화(和)라 한다." 화란 '감응하여 마침내 통함[感而遂通]'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두루 통하는 도'라 한다. (주: 정자가 《주역》 「대전(大傳)」의 글을 끌어 《중용》 미발(未發)의 뜻을 증명하여, 희로애락이 모두 성의 움직임이 정(情)이 된 것이나 아직 사물에 접하지 않아 미발의 때에 있으면 곧 성의 본체의 본연임을 말한 것이다. 그것이 혼륜하여 기댈 데 없음으로 중이라 하니 곧 역에서 말한 적연부동이다. 비록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 만사만물이 모두 이로부터 나오니 바로 근원처(根源處)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큰 근본이 된다. 희로애락이 발함에 이르러 도리가 흘러나와 마침 본연의 절도에 맞으면 곧 정의 자연이다. 그것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고 어그러짐이 없음으로 화라 하니 곧 역에서 말한 감응하여 마침내 통함이다. 그 감응하는 바를 따라 꼭 알맞은 준비가 있어 안배(安排)를 기다리지 않으나 실은 천하 고금이 함께 말미암는 바이므로 천하의 두루 통하는 도가 된다. 요컨대 중은 화의 체요 화는 중의 용이니, 적(寂)은 곧 이른바 체로 그 정한 것으로 말한 것이니 성이요, 감(感)은 곧 이른바 용으로 그 동한 것으로 말한 것이니 정이다. 성은 두 가지 일이 아니요 적과 감은 두 가지 이치가 아니니, 역과 중용이 서로 발명(發明)하고 정자가 사람에게 보인 뜻이 절실하다.)

4. 이천이 말하였다. 마음은 하나이나, 체(體)를 가리켜 말한 것이 있고 용(用)을 가리켜 말한 것이 있으니, 오직 그 보는 바가 어떠한가를 볼 따름이다. (주: 마음은 성과 정을 통섭하므로 체와 용이 있으니, 뭇 이치를 갖춘 것이 그 체요 만사에 응하는 것이 그 용이며, 적연부동한 것이 그 체요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는 것이 그 용이다. 체는 곧 성이니 그 정(靜)하여 안에 보존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요, 용은 곧 정(情)이니 그 밖에 동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 가리키는 바를 따라 각기 보는 바가 있으니 또한 오직 그 보는 바를 볼 뿐이므로 체용이 나뉜다. 요컨대 체를 말하면 용이 그 가운데 있고, 용을 말하면 체도 여기서 드러난다.)

5. 이천이 말하였다. 건(乾)은 하늘이다. 하늘은 건의 형체요, 건은 하늘의 성정(性情)이다. 건은 굳셈[健]이다. 굳세어 쉼이 없음을 건이라 한다. 무릇 하늘을 오로지하여 말하면 도(道)이니 '하늘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나누어 말하면 형체로는 천(天)이라 하고, 주재(主宰)로는 제(帝)라 하며, 공용(功用)으로는 귀신(鬼神)이라 하고, 묘용(妙用)으로는 신(神)이라 하며, 성정으로는 건(乾)이라 한다. (주: 이는 정자가 건의 이름과 뜻을 풀이하고 따라서 분별하여, 이름은 같지 않으나 도는 하나임을 보인 것이다. 대개 건의 상은 하늘이니, 천은 그 형체를 말하고 건은 그 성정을 말한다. 곧 이 형체가 있으매 건의 덕은 굳셈이니, 굳셈의 체는 성이요 굳셈의 용은 정이다. 오직 그 성정이 굳세므로 쉼이 없으니, 이를 살피면 하늘이 하늘 됨을 미루어 논할 수 있다. 무릇 하늘은 이치 밖에서 나오지 않으니 오로지 말하면 곧 도이다. 역에 '하늘도 어기지 않는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나누어 말하면 천·제의 이름이 있고 귀신과 신의 이름이 있으며 다시 건의 이름이 있으나, 요컨대 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형체가 높고 커서 끝이 없는 것은 기가 하는 것이요, 주재가 운용하되 정함이 있는 것은 이가 하는 것이며, 공용으로 조화에 자취가 있는 것은 일월의 왕래, 만물의 굴신(屈伸) 따위로 기에 속하고, 묘용으로 조화에 자취가 없는 것은 운량(運量)의 방향을 알 수 없음, 변화의 단서를 헤아릴 수 없음 따위로 이에 속한다. 성정은 곧 이와 기가 합하여 그 사이에 굳세게 운행하니, 다만 하나의 도리인데 여러 이름을 분별한 것이니 모아 보아 체인(體認)함이 옳다.)

6. 이천이 말하였다. 사덕(四德)의 원(元)은 오상(五常)의 인(仁)과 같다. 치우쳐 말하면 한 가지 일이요, 오로지 말하면 넷을 포괄한다. (주: 사람이 천지의 이치를 얻어 나므로 하늘에서는 원·형·이·정의 사덕이 되고 사람에게는 곧 인·의·예·지·신의 오상이 된다. 그리고 원이란 천지의 낳는 이치요, 인이란 사람 마음의 낳는 이치와 같다. 낳는 이치가 쉬지 않아 끝없이 순환한다. 그러므로 치우쳐 말하면 원은 사덕의 하나요 인은 오상의 하나이나, 오로지 말하면 형(亨)은 다만 낳는 이치의 통함이요 이(利)는 다만 낳는 이치의 이룸이며 정(貞)은 다만 낳는 이치의 갈무리이니 하나의 원이 이를 포괄할 수 있다. 예는 인의 절문(節文)이요 의는 인의 재제(裁制)며 지는 인의 명변(明辨)이요 신은 인의 진실이니 하나의 인이 이를 포괄할 수 있다. 역에 '위대하다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이에 힘입어 비롯하니 하늘을 통섭한다'고 하였으니 하늘을 통섭함을 이른다. 곧 시종이 두루 흐르매 모두 하나의 원이다. 맹자의 사단(四端)의 설도 측은(惻隱) 한 단서로 사양·수오·시비의 단서를 꿰뚫어 통솔하였다. 이를 보면 정자의 말이 진실로 바꿀 수 없는 논(論)이다.)

7. 하늘이 부여한 것이 명(命)이요, 사물이 받은 것이 성(性)이다.

8. 귀신은 조화(造化)의 자취이다.

9. 박괘(剝卦)는 여러 양(陽)이 깎여 이미 다하고 홀로 상구(上九) 한 효(爻)만 남은 것이다. 마치 큰 과실이 먹히지 않아 장차 다시 살아날 이치가 있는 것과 같다. 상구마저 변하면 순음(純陰)이 된다. 그러나 양에는 다할 수 있는 이치가 없다. 위에서 변하면 아래에서 생겨 쉴 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성인이 이 이치를 밝혀 양과 군자의 도가 없어질 수 없음을 보였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박이 다하면 순곤(純坤)이 되니 어찌 다시 양이 있겠는가?" 답하였다. 괘를 달에 배합하면 곤은 시월(十月)에 해당한다. 기(氣)의 소식(消息)으로 말하면 양이 깎여 곤이 되고 양이 와서 복(復)이 되니 양은 일찍이 다한 적이 없다. 위에서 다하면 아래에서 다시 생긴다. 그러므로 시월을 양월(陽月)이라 하니, 그 양이 없는가 의심할까 염려해서이다. 음도 그러하나 성인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10. 한 양(陽)이 아래에서 회복함이 곧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心]이다. 선유(先儒)는 모두 정(靜)으로 천지의 마음을 본다 하였으나, 대개 움직임의 단서가 곧 천지의 마음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도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가 능히 알겠는가.

11. 인(仁)은 천하의 공(公)이요 선(善)의 근본이다.

12. 감응[感]이 있으면 반드시 응(應)함이 있다. 무릇 움직임이 있으면 모두 감응이 되고, 감응하면 반드시 응함이 있다. 응한 것이 다시 감응이 되고 감응한 것이 다시 응함이 있으니, 이로써 그치지 않는다. 감통(感通)의 이치는 도를 아는 자가 묵묵히 살펴보면 된다.

13. 천하의 이치는 끝나면 다시 시작하니, 이로써 항상하여 다하지 않는다. 항(恒)은 일정함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일정하면 항상할 수 없다. 오직 때를 따라 변역(變易)하는 것이 곧 떳떳한 도이다. 천지의 항구한 도요 천하의 항구한 이치이다. 도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가 능히 알겠는가.

14. 사람의 성(性)은 본래 선한데 고칠 수 없는 자가 있음은 어째서인가? 답한다. 그 성을 말하면 모두 선하나, 그 재(才)를 말하면 하우(下愚)로 옮기지 못하는 자가 있다. 이른바 하우에는 둘이 있으니 자포(自暴)와 자기(自棄)이다. 사람이 진실로 선으로 스스로 다스리면 옮기지 못할 것이 없다. 비록 지극히 혼우(昏愚)하여도 모두 점차 갈고닦아 나아갈 수 있다. 오직 자포하는 자는 믿지 않음으로 거부하고, 자기하는 자는 하지 않음으로 끊는다. 비록 성인이 함께 거처하여도 화하여 들어가게 할 수 없다. 중니(공자)가 이른 하우이다. 그러나 천하에 자기·자포하는 자가 반드시 모두 혼우한 것은 아니다. 왕왕 강포하고 재력(才力)이 남보다 뛰어난 자가 있으니 상신(商辛, 은의 주왕)이 이것이다. 성인이 그가 스스로 선에서 끊었으므로 하우라 하였다. 그러나 그 귀결을 살피면 진실로 어리석다. 이미 하우라 하였는데 그 낯빛을 고칠 수 있음은 어째서인가? 답한다. 마음은 비록 선한 도에서 끊겼으나 위엄을 두려워하여 죄를 적게 함은 남과 같다. 오직 남과 같음이 있으니 이로써 그것이 성의 죄가 아님을 안다. 사물에 있으면 이(理)요, 사물을 처리하면 의(義)이다.

16. 동정(動靜)은 단서가 없고 음양은 시작이 없다. 도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가 능히 알겠는가.

17. 인(仁)은 천하의 바른 이치이다. 바른 이치를 잃으면 질서가 없어 화(和)하지 못한다.

18. 명도 선생(정호)이 말하였다. 천지가 만물을 낳음에 각기 부족한 이치가 없다. 항상 천하의 군신·부자·형제·부부 간에 얼마나 많은 분수를 다하지 못하는 곳이 있는가를 생각하라.

19. "충신(忠信)으로 덕에 나아가고"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쓴다." 군자는 마땅히 종일토록 '하늘을 마주 대하듯' 해야 한다. 대개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그 체(體)는 역(易)이라 하고, 그 이(理)는 도(道)라 하며, 그 용(用)은 신(神)이라 하고, 사람에게 명(命)한 것은 성(性)이라 하며, 성을 따름을 도라 하고, 도를 닦음을 교(敎)라 한다. 맹자가 그 가운데서 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발휘해 내었으니 다하였다 할 만하다. 그러므로 신(神)을 두고 '그 위에 있는 듯하며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다' 하고, 크고 작은 일을 다만 '성(誠)을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고만 하였다. 무릇 위아래로 꿰뚫음이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는다. '형이상(形而上)은 도요 형이하(形而下)는 기(器)이다.' 모름지기 이같이 말해야 하니, 기도 도요 도도 기이다. 다만 도가 있음을 얻으면 지금과 후세, 나와 남에 매이지 않는다.

20. 의서(醫書)에 '손발이 마비되어 감각 없음을 불인(不仁)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이 가장 잘 형용한 것이다. 인자(仁者)는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으니 자기 아님이 없다. 자기로 인정하면 어디인들 이르지 않겠는가? 만약 자기에게 두지 않으면 절로 자기와 상관없게 된다. 손발이 마비됨에 기(氣)가 이미 통하지 않아 모두 자기에 속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널리 베풀어 뭇사람을 구제함은 곧 성인의 공용(功用)이다. 인(仁)은 지극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다만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우고 자기가 통달하고자 하면 남을 통달하게 한다. 능히 가까운 데서 비유를 취하면 인의 방법이라 할 만하다'고만 하였다. 이같이 인을 관찰하게 하면 인의 본체를 얻을 수 있다.

21. 낳음을 성(性)이라 한다. 성이 곧 기(氣)요 기가 곧 성이니, 낳음을 이른 것이다. 사람이 나매 기(氣)를 받음에 이치상 선악이 있다. 그러나 이는 성 가운데 본래 이 두 물건이 상대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선한 자가 있고 어려서부터 악한 자가 있으니, 이는 기품(氣稟)이 그러한 것이다. 선은 본래 성이나, 그러나 악도 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개 낳음을 성이라 한다. 사람이 나서 고요한 이상은 말로 용납할 수 없다. 성을 말하는 순간 이미 성이 아니다. 무릇 사람이 성을 말함은 다만 '잇는 것이 선이다'를 말하는 것이니, 맹자가 성선(性善)을 말함이 이것이다. 무릇 이른바 '잇는 것이 선이다'란 물이 흘러 아래로 가는 것과 같다. 모두 물이니, 흘러 바다에 이르도록 끝내 더러워지지 않음이 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흘러 멀지 않아 이미 점차 흐려짐이 있고, 나와 매우 멀어서야 비로소 흐려짐이 있다. 흐림이 많은 것도 있고 적은 것도 있다. 맑고 흐림이 비록 같지 않으나 흐린 것을 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같으니 사람이 맑게 다스리는 공[澄治之功]을 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힘쓰기를 민첩하고 용맹하게 하면 빨리 맑아지고, 힘쓰기를 느리고 게으르게 하면 더디 맑아진다. 그 맑아짐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다만 애초의 물일 뿐이다. 맑은 것을 가져다 흐린 것과 바꾸는 것도 아니요, 흐린 것을 꺼내어 한 모퉁이에 두는 것도 아니다. 물의 맑음은 곧 성선을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이 성 가운데서 두 물건으로 상대하여 각기 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 이치가 천명(天命)이다. 따라서 좇으면 도(道)요, 이를 좇아 닦아 각기 그 분수를 얻으면 교(敎)이다. 천명에서 교에 이르기까지 내가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이것이 순임금이 천하를 가지고도 관여하지 않은 까닭이다.

22. 천지가 만물을 낳는 기상(氣象)을 관찰하라.

23. 만물의 살려는 뜻[生意]이 가장 볼 만하니, 이 원(元)이라는 것이 선(善)의 으뜸이다. 이것이 인(仁)이라 할 만하다.

24. 가슴속에 가득한 것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25. 천지만물의 이치는 홀로인 것이 없고 반드시 짝[對]이 있다. 모두 자연히 그러한 것이요 안배(安排)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매양 한밤중에 이를 생각하매 손이 춤추고 발이 구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26. 중(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다. 천지 사이에 우뚝하고 마땅하여 곧장 위아래로 통하는 바른 이치이다. 벗어나면 옳지 않다. 오직 경(敬)하여 잃음이 없음이 가장 극진하다.

27.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공(公)이면 하나요, 사(私)면 만 가지로 다르다.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음이 얼굴과 같다"는 것은 다만 사심(私心)일 뿐이다.

28. 무릇 사물에는 본말(本末)이 있으나 본과 말을 두 동강 난 일로 나눌 수 없다. "물 뿌리고 쓸며 응대하는 것"이 그 그러한 것[然]이니 반드시 그러한 까닭[所以然]이 있다.

29. 양자(양주)는 터럭 하나 뽑는 것도 하지 않았고, 묵자는 또 정수리를 갈아 발꿈치에 이르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 중(中)을 얻지 못한 것이다. 자막(子莫)이 중을 잡은 것에 이르러서는 이 둘의 중을 잡으려 한 것이나, 어떻게 잡을지 알지 못한다. 알면 일마다 사물마다 모두 천연히 하나의 중이 그 위에 있어 사람의 안배를 기다리지 않는다. 안배하면 중이 아니다.

30. 시중(時中)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답하였다. 중(中) 자가 가장 알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묵묵히 알아 마음으로 통해야 한다. 우선 한 청사(廳)를 말하면 중앙이 중이 된다. 한 집이면 청사의 가운데가 중이 아니라 당(堂)이 중이 된다. 한 나라를 말하면 당이 중이 아니라 나라의 가운데가 중이 된다. 이런 유로 미루면 알 수 있다. 가령 '세 번 그 문을 지나도 들어가지 않음'은 우(禹)·직(稷)의 세상에서는 중이 되나 '누추한 거리에 거함'은 중이 아니며, 누추한 거리에 거함은 안자(顔子)의 때에는 중이 되나 '세 번 그 문을 지나도 들어가지 않음'은 중이 아니다.

31. 망령됨이 없음을 성(誠)이라 하고, 속이지 않음은 그 다음이다.

32. 텅 비고 막막하여 조짐이 없으나 만상(萬象)이 빽빽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아직 응하지 않은 것이 먼저가 아니요 이미 응한 것이 나중이 아니다. 백 척의 나무가 뿌리에서 가지와 잎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로 꿰뚫린 것과 같다. 위쪽 한 단락의 일은 형체도 없고 조짐도 없으니 도리어 사람이 천천히 안배하여 끌어들여 길[塗轍]로 들어가게 함을 기다린다고 말할 수 없다. 이미 길이면 도리어 다만 하나의 길일 뿐이다.

33. 가까이 몸에서 취하면 온갖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다. 굽히고 펴며 가고 오는 뜻은 다만 코의 숨[鼻息] 사이에서 볼 수 있다. 굽히고 펴며 가고 옴은 다만 이치이니, 반드시 이미 굽힌 기를 다시 막 펴는 기로 삼을 필요가 없다. 낳고 낳는 이치가 자연히 쉬지 않는다. 복괘(復卦)에 '이레 만에 와서 회복한다'고 한 것과 같으니, 그 사이가 본래 끊어지지 않고 양이 이미 회복하여 생긴다. '사물이 지극하면 반드시 돌아온다.' 그 이치가 모름지기 이와 같다. 낳음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34.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천지 사이에는 다만 하나의 감(感)과 응(應)이 있을 뿐이다.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35. 인(仁)을 물었다.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이는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할 일이다. 성현이 인을 말한 곳을 가져다 유취(類聚)하여 보고 체인(體認)해 내라. 맹자가 '측은지심이 인이다'라고 하였다. 후인이 마침내 사랑[愛]을 인이라 하였다. 사랑은 본래 정(情)이요 인은 본래 성(性)이니, 어찌 오로지 사랑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맹자가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미 인의 단서라 하였으면 곧 인이라 할 수 없다. 한퇴지(한유)가 '널리 사랑함을 인이라 한다'고 한 것은 그르다. 인자는 본래 널리 사랑하나 곧 널리 사랑함을 인이라 함은 옳지 않다.

36. 인과 마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물었다. 답하였다. 마음은 곡식의 씨와 같다. 낳는 성[生之性]이 곧 인이다. 양기(陽氣)가 발하는 곳이 곧 정(情)이다.

37. 의(義)는 마땅함[宜]으로 뜻을 새기고 예(禮)는 분별[別]로 뜻을 새기는데, 인(仁)은 마땅히 무엇으로 새겨야 하는가? 말하는 자가 깨달음[覺]으로 새기고 사람[人]으로 새기는데 모두 그르다. 마땅히 공·맹이 인을 말한 곳을 합하여 대개 연구해 가면 두세 해에 얻어도 늦지 않다.

38. 성(性)이 곧 이(理)이다. 천하의 이치는 그 나온 바를 따져 보면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 희로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았으니 어찌 일찍이 선하지 않겠는가? 발하여 절도에 맞으면 어디를 가도 선하지 않음이 없다. 무릇 선악을 말함은 모두 선이 먼저요 악이 나중이며, 길흉을 말함은 모두 길이 먼저요 흉이 나중이며, 시비를 말함은 모두 옳음이 먼저요 그름이 나중이다.

39. 마음에 선악이 있는가를 물었다. 답하였다. 하늘에서는 명(命)이요 사물에서는 이(理)이며 사람에게서는 성(性)이요 몸을 주재함은 마음[心]이니, 그 실은 하나이다. 마음은 본래 선하나 사려(思慮)에 발하면 선함과 선하지 않음이 있다. 이미 발하면 정(情)이라 할 수 있고 마음이라 할 수 없다. 물에 비유하면 다만 물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흘러 갈래[派]가 되어 혹 동으로 가고 혹 서로 감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흐름[流]이라 한다.

40. 성(性)은 하늘에서 나오고 재(才)는 기(氣)에서 나온다. 기가 맑으면 재가 맑고 기가 흐리면 재가 흐리다. 재에는 선함과 선하지 않음이 있으나 성에는 선하지 않음이 없다.

41. 성(性)은 자연히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신(信)은 다만 이것을 가짐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단(四端)에 신을 말하지 않았다.

42. 마음은 낳는 도[生道]이다. 이 마음이 있으매 이 형체를 갖추어 산다. 측은지심은 사람의 낳는 도이다.

43. 횡거 선생(장재)이 말하였다. 기(氣)가 태허(太虛)에 뭉쳐 오르내리고 날아오르며 일찍이 그치고 쉰 적이 없다. 이것이 허실(虛實)·동정(動靜)의 기틀이요 음양(陰陽)·강유(剛柔)의 시작이다. 떠서 오르는 것은 양의 맑음이요, 내려서 아래로 가는 것은 음의 흐림이다. 그 감응하여 모이고 맺혀 바람과 비가 되고 서리와 눈이 된다. 만물의 유행(流行)과 산천의 융결(融結), 술지게미와 타다 남은 재가 가르침[敎] 아님이 없다.

44. 떠도는 기(氣)가 어지러이 섞여 합하여 바탕을 이룬 것이 사람과 만물의 온갖 다름을 낳는다. 그 음양 두 끝이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 천지의 큰 의(義)를 세운다.

45. 하늘이 사물을 체득하여 빠뜨리지 않음은 인(仁)이 일을 체득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음과 같다. '예의(禮儀)가 삼백이요 위의(威儀)가 삼천이라.' 한 물건도 인 아님이 없다. '넓은 하늘이 밝아 너의 출왕(出王)에 미치며, 넓은 하늘이 환하여 너의 유연(遊衍)에 미친다.' 한 물건도 체득되지 않음이 없다.

46. 귀신은 두 기운[二氣]의 양능(良能)이다.

47. 사물이 처음 생길 때 기가 날로 이르러 불어나고, 사물이 나서 이미 가득 차면 기가 날로 돌이켜 흩어진다. 이름을 신(神)이라 하니 그 폄[伸]으로써요, 돌이킴을 귀(鬼)라 하니 그 돌아감[歸]으로써이다.

48. 성(性)은 만물의 한 근원이니 내가 사사로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대인(大人)이라야 능히 그 도를 다한다. 그러므로 서면 반드시 함께 서고, 알면 반드시 두루 알며, 사랑하면 반드시 아울러 사랑하고, 이루면 홀로 이루지 않는다. 저 스스로 가리고 막혀 나의 이치를 따를 줄 모르는 자는 또한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다.

49. 하나이므로 신(神)이다. 사람 몸에 비유하면 사지(四肢)가 모두 한 물건이므로 닿으면 느끼지 않음이 없다. 마음이 부려 여기에 이르기를 기다린 뒤에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감응하여 마침내 통함[感而遂通]', '가지 않아도 이르고 빠르지 않아도 신속함'이다.

50. 마음[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섭하는 것이다.

51. 무릇 사물이 이 성(性)을 가지지 않음이 없다. 통함과 막힘, 열림과 닫힘으로 말미암아 사람과 사물의 구별이 있다. 막힘에 두텁고 얇음이 있으므로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구별이 있다. 막힌 것은 굳어 열 수 없고, 두터운 것은 열 수 있으나 여는 것이 어려우며, 얇은 것은 여는 것이 쉽다. 열리면 천도(天道)와 성인에 통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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