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 02 위학(為學)
권2 「위학(爲學)」은 모두 111조로, 학문하는 요체를 총론한다. 덕성을 높이려면[尊德性] 반드시 학문으로 말미암아야[道問學] 하니, 도체(道體)에 밝아 돌아갈 곳을 안 뒤에야 학문의 대강(大綱)을 궁구할 수 있다.
번역
위학(爲學) (주: 모두 111조이다.)
이 권은 학문하는 요체를 총론한다. 대개 '덕성을 높임[尊德性]'을 하였으면 반드시 '학문으로 말미암아[道問學]' 도체에 밝아 가리키는 곳을 알아야 학문의 대강을 궁구할 수 있다.
1. 염계 선생이 말하였다. 성인은 하늘을 바라고, 현인은 성인을 바라며, 선비는 현인을 바란다. 이윤(伊尹)과 안연(顔淵)은 큰 현인이다. 이윤은 그 임금이 요순(堯舜) 같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저잣거리에서 종아리 맞는 듯이 여겼다. 안연은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하지 않았으며' '석 달을 인(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윤이 뜻한 바를 뜻하고 안자가 배운 바를 배우면, 지나치면 성인이요 미치면 현인이며 미치지 못하여도 또한 좋은 이름을 잃지 않는다.
2. 성인의 도가 귀에 들어와 마음에 보존되면, 쌓여 덕행(德行)이 되고 행하여 사업(事業)이 된다. 저 문사(文辭)만 일삼는 자는 비루하다.
3. 어떤 이가 물었다. 성인의 문하에 그 무리가 삼천이었는데 유독 안자를 호학(好學)한다 일컬었으니, 무릇 시·서·육예(六藝)를 삼천 제자가 익혀 통하지 않은 것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안자가 홀로 좋아한 것은 무슨 배움인가?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배워서 성인의 도에 이르는 것이다. 성인을 배워서 이를 수 있는가? 답한다. 그렇다. 배우는 도는 어떠한가? 답한다. 천지가 정(精)을 쌓아 오행의 빼어남을 얻은 것이 사람이 된다. 그 근본은 참되고 고요하며, 그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 다섯 가지 성(性)이 갖추어지니 인·의·예·지·신이다. 형체가 이미 생기매 외물(外物)이 그 형체에 닿아 그 속을 움직인다. 그 속이 움직여 칠정(七情)이 나오니 희·로·애·락·애·오·욕이다. 정(情)이 이미 성하여 더욱 방탕하면 그 성이 깎인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그 정을 단속하여 중(中)에 합하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며 그 성을 기른다. 어리석은 자는 절제할 줄 몰라 그 정을 멋대로 하여 사벽(邪僻)에 이르고 그 성을 질곡(桎梏)하여 잃는다. 그러나 배우는 도는 반드시 먼저 마음에 밝혀 기를 바를 안 뒤에 힘써 행하여 이르기를 구하니, 이른바 '밝음으로부터 정성스러워짐[自明而誠]'이다. 정성스럽게 하는 도는 도를 믿음을 돈독히 함에 있다. 도를 믿음이 돈독하면 행함이 과단하고, 행함이 과단하면 지킴이 견고하다. 인·의·충·신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급한 때에도 반드시 이에 하고 엎어지는 때에도 반드시 이에 하며' 출처(出處)와 어묵(語默)에도 반드시 이에 하여 오래도록 잃지 않으면 거함이 편안하고, 행동거지가 예에 맞아 사벽한 마음이 절로 생길 데가 없다. 그러므로 안자가 일삼은 것을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고 하였다. 중니가 그를 일컬어 '한 가지 선을 얻으면 받들어 가슴에 품어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하지 않으며' '선하지 못함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한 적이 없고 알면 일찍이 다시 행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 좋아함이 돈독함이요 배우는 도이다. 그러나 성인은 '생각하지 않고도 얻고 힘쓰지 않고도 맞으나' 안자는 반드시 생각한 뒤에 얻고 반드시 힘쓴 뒤에 맞으니, 그 성인과의 거리가 한 숨이다. 이르지 못한 바는 지킴이요 화(化)함이 아니다. 그 호학하는 마음으로 햇수를 빌려 주었으면 며칠 안 되어 화하였을 것이다. 후인이 통달하지 못하여 성인은 본래 나면서 아는 것[生知]이어서 배움으로 이를 수 없다 하여 학문의 도가 마침내 없어졌다. 자기에게서 구하지 않고 밖에서 구하여 박문강기(博聞強記)와 교묘한 문장, 화려한 문사를 공(工)으로 삼아 그 말을 영화롭게 하니 도에 이르는 자가 드물었다. 곧 지금의 배움은 안자가 좋아한 바와 다르다.
4. 횡거 선생이 명도 선생에게 물었다. 성(性)을 정(定)함이 아직 움직이지 않을 수 없어 오히려 외물에 매이니 어떠합니까?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이른바 정(定)이란 동(動)에서도 정하고 정(靜)에서도 정하여, 보냄도 맞음도 없고 안도 밖도 없습니다. 진실로 외물을 밖으로 여겨 자기를 끌어 따른다면 이는 자기의 성에 안과 밖이 있다 함이요, 또 성을 밖에서 사물을 따른다 한다면 그것이 밖에 있을 때 무엇이 안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밖의 유혹을 끊는 데 뜻을 두어 성에 안팎이 없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미 안과 밖을 두 근본으로 삼으면 또 어찌 갑자기 정(定)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천지의 떳떳함은 그 마음이 만물에 두루 하면서도 마음이 없음으로써요, 성인의 떳떳함은 그 정(情)이 만사에 순응하면서도 정(情)이 없음으로써입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확연(廓然)히 크게 공정하여 사물이 오면 순순히 응함만 한 것이 없습니다. 《주역》에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으니, 자주 오가면 벗만 너의 생각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밖의 유혹을 없애는 데 구구하면 장차 동쪽에서 없애고 서쪽에서 생김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비단 날이 모자랄 뿐 아니라 그 단서가 무궁함을 돌아보면 없앨 수 없습니다. 사람의 정(情)은 각기 가린 바가 있으므로 도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대개 병통이 자사(自私, 스스로 사사로움)와 용지(用智, 지혜를 씀)에 있습니다. 자사하면 작위(作爲)함으로 자취에 응할 수 없고, 용지하면 밝게 깨달음으로 자연을 삼을 수 없습니다. 이제 외물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물 없는 경지를 비추기를 구하니, 이는 거울을 뒤집어 비춤을 찾는 것입니다. 《주역》에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뜰을 다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고, 맹씨도 '지혜를 미워하는 까닭은 그것이 천착(穿鑿)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밖을 그르다 하고 안을 옳다 함은 안팎을 둘 다 잊음만 못합니다. 둘 다 잊으면 맑아 일이 없습니다. 일이 없으면 정(定)하고, 정하면 밝으며, 밝으면 다시 무슨 사물에 응함이 누(累)가 되겠습니까? 성인의 기쁨은 사물의 마땅히 기뻐할 만함으로써요, 성인의 노여움은 사물의 마땅히 노할 만함으로써입니다. 이는 성인의 희로(喜怒)가 마음에 매이지 않고 사물에 매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인이 어찌 사물에 응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밖에서 따르는 것을 그르다 하고 다시 안에 있는 것을 구하여 옳다 하겠습니까? 이제 자사·용지의 희로로써 성인의 바른 희로를 본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무릇 사람의 정이 발하기 쉽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오직 노여움이 가장 심합니다. 다만 노여울 때 문득 그 노여움을 잊고 이치의 시비를 보면 또한 밖의 유혹이 미워할 것이 못 됨을 볼 수 있으니, 도에 대해서도 생각이 절반은 넘은 것입니다.
5. 이천 선생이 주장문(朱長文)에게 답한 편지에 말하였다. 성현의 말은 부득이한 것이다. 대개 이 말이 있으면 이 이치가 밝아지고 이 말이 없으면 천성(天性)의 이치에 빠짐이 있다. 저 쟁기와 보습, 질그릇과 야금(冶金)의 그릇이 하나라도 만들어지지 않으면 사람 살리는 도가 부족함이 있는 것과 같다. 성현의 말은 비록 그만두려 한들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천하의 이치를 다 포함하면서도 또한 매우 간략하다. 후세 사람은 책을 잡으면 문장을 먼저로 삼는다. 평생에 하는 바가 흔히 성인보다 많으나, 있어도 보탬이 없고 없어도 빠짐이 없으니 곧 쓸데없는 군말이다. 군더더기일 뿐 아니라 이미 그 요체를 얻지 못하면 참됨에서 떠나고 바름을 잃어 도리어 도를 해침이 틀림없다. 보내온 편지에 이른바 '후인으로 하여금 그가 선을 잊지 않았음을 보게 하고자 한다'는 것은 곧 세인(世人)의 사심(私心)이다. 공자가 '죽은 뒤에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미워한다'고 한 것은 죽도록 일컬을 만한 선이 없음을 미워한 것이지 이름 없음을 미워한 것이 아니다. 이름이란 중인(中人)을 권면할 수 있는 것이나, 군자가 두는 바는 급급히 할 바가 아니다.
6. 안으로 충신(忠信)을 쌓음은 덕에 나아가는 까닭이요, 말을 가리고 뜻을 돈독히 함은 업(業)에 거하는 까닭이다. 이를 곳을 알아 이름은 치지(致知)이니, 이를 곳을 알기를 구한 뒤에 이른다. 앎이 먼저에 있으므로 더불어 기미를 함께할 수 있으니, 이른바 '조리(條理)를 시작함은 지(智)의 일이다.' 끝을 알아 끝맺음은 힘써 행함이니, 이미 끝낼 곳을 알면 힘써 나아가 끝맺는다. 지킴이 나중에 있으므로 더불어 의(義)를 보존할 수 있으니, 이른바 '조리를 끝맺음은 성(聖)의 일이다.' 이것이 배움의 시작과 끝이다.
7. 군자는 경(敬)을 주장하여 그 안을 곧게 하고, 의(義)를 지켜 그 밖을 방정(方正)하게 한다. 경이 서면 안이 곧고 의가 드러나면 밖이 방정하다. 의가 밖에 드러남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경과 의가 이미 서면 그 덕이 성하다. 큰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커지니 덕이 외롭지 않다. 쓰는 데마다 두루 하지 않음이 없고 베푸는 데마다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8. 하늘로 움직임이 무망(無妄)이요, 인욕(人欲)으로 움직이면 망령됨이다. 무망의 뜻이 크도다! 비록 삿된 마음이 없어도 진실로 바른 이치에 합하지 않으면 망령됨이니 곧 삿된 마음이다. 이미 망령됨이 없으면 마땅히 감[往]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가면 망령됨이다. 그러므로 무망괘의 단사(彖辭)에 '그 바르지 않으면 재앙이 있으니 갈 바를 둠이 이롭지 않다'고 하였다.
9. 사람의 온축(蘊蓄)은 배움으로 말미암아 커진다. 옛 성현의 말과 행실을 많이 들음에 있다. 자취를 살펴 그 쓰임을 보고 말을 살펴 그 마음을 구하여, 알아 얻어서 그 덕을 쌓아 이룬다.
10. 함괘(咸卦)의 상(象)에 '군자는 마음을 비워 남을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전(傳)에 말하였다. '속에 사사로이 주장함이 없으면 감응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다. 분량으로 용납하고 합함을 가려 받음은 성인이 감응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는 도가 아니다.' 그 구사(九四)에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으나 자주 오가면 벗만 너의 생각을 따른다'고 하였다. 전에 말하였다. '감(感)은 사람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함괘는 모두 사람 몸에서 상을 취하였다. 사(四)는 심위(心位)에 해당하나 '그 마음에 감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감응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감응의 도는 통하지 않음이 없다. 사사로이 매인 바가 있으면 감통(感通)을 해치니 이른바 뉘우침이다. 성인이 천하의 마음을 감응함은 추위·더위·비·갬이 통하지 않음이 없고 응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 또한 바를[貞] 따름이다. 바름이란 속을 비워 나[我]가 없음을 이른다. 만약 자주 오가는 듯이 그 사심으로 사물을 감응하면, 생각이 미치는 바는 능히 감응하여 움직이나 미치지 못하는 바는 능히 감응하지 못한다. 매인 사심으로 이미 한 모퉁이 한 가지 일에 주장하니, 어찌 확연히 통하지 않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11. 군자가 어려움을 만나면 반드시 스스로 몸에 살펴, 잘못이 있어 이를 부른 것인가 한다. 선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고치고,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더욱 힘쓰니, 곧 스스로 그 덕을 닦음이다.
12. 밝지 않으면 움직여도 갈 곳이 없고, 움직이지 않으면 밝아도 쓸 곳이 없다.
13. 습(習)은 거듭 익힘이다. 때로 다시 생각하고 풀어 속에 흠뻑 젖으면 기쁘다. 선으로 남에게 미쳐 믿고 따르는 자가 많으므로 즐거울 수 있다. 비록 남에게 미침을 즐거워하나, 옳다 여겨 주지 않아도 답답해하지 않음이 곧 이른바 군자이다.
14. 옛 배우는 자는 자기를 위하였으니 자기에게 얻고자 함이요, '지금 배우는 자는 남을 위하니' 남에게 보이고자 함이다.
15. 이천 선생이 방도보(方道輔)에게 말하였다. 성인의 도는 평탄하기가 큰길과 같다. 배우는 자는 그 문(門)을 얻지 못함을 병으로 여길 뿐이다. 그 문을 얻으면 멀어도 이르지 못할 데가 없다. 그 문에 들기를 구함이 경(經)에 말미암지 않겠는가? 지금 경을 다스리는 자도 많다. 그러나 '궤를 사고 구슬을 돌려주는' 가림이 사람마다 모두 그러하다. 경은 도를 싣는 까닭이다. 그 말을 외고 그 훈고(訓詁)를 풀되 도에 미치지 못하면 곧 쓸데없는 술지게미일 뿐이다. 바라건대 그대는 경으로 말미암아 도를 구하여 힘쓰고 또 힘쓰라. 후일 우뚝하여 앞에 섬을 보면, 그런 뒤에 손이 춤추고 발이 구름을 알지 못하여 힘쓰지 않아도 스스로 그칠 수 없을 것이다.
16.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말을 닦아 그 성(誠)을 세움'은 자세히 이회(理會)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을 닦고 살필 수 있음이 곧 성(誠)을 세우려 함이다. 만약 다만 말을 꾸미는 것을 마음으로 삼으면 다만 거짓을 함이다. 만약 그 말을 닦음이 바로 자기의 성의(誠意)를 세움을 위함이면, 곧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 밖을 방정하게 함'의 실제 일을 자기에게 체득함이다. 도가 넓고 넓으니 어디에 손을 댈 것인가? 오직 성(誠)을 세워야 비로소 거할 곳이 있다. 거할 곳이 있으면 업(業)을 닦을 수 있다.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씀'의 크고 작은 일이 도리어 다만 충신(忠信)으로 덕에 나아감이니 실제로 손대는 곳이요, 말을 닦아 그 성을 세움이 실제로 업을 닦는 곳이다.
17.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도에 뜻함이 간절함은 본래 성의(誠意)이다. 그러나 급박하여 이치에 맞지 않으면 도리어 성실하지 못함이 된다. 대개 실제 이치 가운데 절로 완급(緩急)이 있어 이같이 급박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천지의 화(化)함을 보면 알 수 있다.
18. 맹자는 재주가 높아 배움에 의거할 데가 없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안자를 배워야 성인에 들기가 가깝고 힘쓸 곳이 있다. 또 말하였다. 배우는 자가 어긋나지 않게 배우려면 모름지기 안자를 배워야 한다.
19.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우선 바깥일을 줄이고 다만 선(善)에 밝아 오직 정성스러운 마음을 나아가게 하라. 그 문장이 비록 맞지 않아도 멀지 않을 것이다. 지키는 바가 간략하지 않으면 범람(汎濫)하여 공이 없다.
20. 배우는 자가 인(仁)의 본체를 알아 실제로 자기에게 두면, 다만 의리로 배양(培養)하기만 하면 된다. 경의(經義)를 구함 같은 것이 모두 배양하는 뜻이다.
21. 옛날 주무숙(주돈이)에게 배울 때, 매양 안자와 중니가 즐거워한 곳,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가를 찾게 하였다.
22. 보는 바와 기약하는 바는 멀고 또 크지 않을 수 없으나, 행함은 또한 모름지기 힘을 헤아려 점차로 해야 한다. 뜻이 크되 마음이 수고롭고 힘이 작되 짐이 무거우면 끝내 일을 그르칠까 두렵다.
23. 벗과 강습(講習)함은 다시 '서로 보아 선하게 함[相觀而善]'만큼 공부가 많은 것이 없다.
24. 모름지기 그 마음을 크게 하여 넓게 열어야 한다. 비유하면 구층 누대를 짓는 것은 모름지기 다리[기초]를 크게 만들어야 되는 것과 같다.
25.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순임금이 밭이랑 가운데서 일어남으로부터 백리해(百里奚)가 저잣거리에서 천거됨에 이르기까지, 만약 익으려면 또한 모름지기 이런 데를 거쳐야 한다.
26. 증삼(曾參)도 마침내 노둔(魯鈍)함으로 얻었다.
27. 명도 선생은 기송(記誦)과 박식(博識)을 '사물에 빠져 뜻을 잃음[玩物喪志]'이라 하였다.
28. 예악(禮樂)은 다만 나아가고 돌이키는 사이에 있으니, 곧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는다.
29.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라 천지 사이에 피할 데가 없다. 어찌 천분(天分)을 얻어 사심이 없겠는가마는, 한 가지라도 의롭지 않은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임은 하지 않는 바가 있다. 털끝만 한 사사로움이 있어도 곧 왕자(王者)의 일이 아니다.
30. 성(性)을 논하되 기(氣)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고, 기를 논하되 성을 논하지 않으면 밝지 않다. 둘로 나누면 옳지 않다.
31. 배움을 논하면 곧 이치를 밝혀야 하고, 다스림을 논하면 모름지기 대체(大體)를 알아야 한다.
32. 증점(曾點)과 칠조개(漆雕開)는 이미 큰 뜻을 보았으므로 성인이 인정하였다.
33. 근본을 모름지기 먼저 배양한 뒤에 향할 바[趨向]를 세울 수 있다. 향할 바가 이미 바르면, 나아가는 바의 깊고 얕음은 곧 힘씀과 힘쓰지 않음에 말미암는다.
34. 경(敬)과 의(義)를 함께 지니면 곧장 천덕(天德)에 통달함이 이로부터 한다.
35. 게으른 뜻이 한 번 생기면 곧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해침[自棄自暴]이다.
36. 배우지 않으면 곧 늙어 쇠한다.
37. 사람의 배움이 나아가지 않음은 다만 용맹하지 못함이다.
38. 배우는 자가 기(氣)에 이기고 습관에 빼앗기면 다만 뜻[志]을 꾸짖을 뿐이다.
39. 안이 무거우면 밖의 가벼움을 이길 수 있고, 얻음이 깊으면 유혹의 작음을 볼 수 있다.
40. 동중서(董仲舒)가 '그 의를 바르게 하고 이익을 꾀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고 공(功)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고, 손사막(孫思邈)이 '담(膽)은 크고자 하고 마음은 작고자 하며, 지(智)는 둥글고자 하고 행(行)은 방정하고자 한다'고 하였으니, 법으로 삼을 만하다.
41. 대저 배움은 말하지 않아도 절로 얻는 것이 곧 자득(自得)이다. 안배(安排)와 포치(布置)가 있는 것은 모두 자득이 아니다.
42. 보고 듣고 생각하고 동작함이 모두 하늘[天]이다. 사람은 다만 그 가운데서 참됨과 망령됨을 알아내야 할 뿐이다.
43.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배움은 다만 채찍질하여 안으로 가까이하여 자기에게 붙일 뿐이다. 그러므로 '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 '말이 충신하고 행실이 독실하고 공경스러우면 비록 오랑캐 나라에서도 행해지고, 말이 충신하지 않고 행실이 독실하지 않으면 비록 향리(鄕里)에선들 행해지겠는가? 서면 그것이 앞에 참여함을 보고, 수레에 타면 그것이 멍에에 기댐을 본 뒤에 행해진다.' 다만 이것이 배움이다. 바탕이 아름다운 자는 밝게 깨달아 다하면 찌꺼기가 곧 혼연히 화하여 도리어 천지와 한 몸이 된다. 그 다음은 오직 장경(莊敬)으로 지켜 기름이니, 그 지극함에 이르면 하나이다.
44. '충신으로 덕에 나아가고, 말을 닦아 그 성을 세움으로 업에 거함'은 건(乾)의 도요, '경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로 밖을 방정하게 함'은 곤(坤)의 도이다.
45. 무릇 사람이 막 배우면 모름지기 힘쓸 곳을 알아야 한다. 이미 배웠으면 모름지기 힘을 얻을 곳을 알아야 한다.
46. 어떤 사람이 원포(園圃)를 다스리며 지력(知力)을 부려 매우 수고하였다. 선생이 말하였다. 고괘(蠱卦)의 상에 '군자는 백성을 진작(振作)하고 덕을 기른다'고 하였다. 군자의 일은 오직 이 둘이 있을 뿐 다른 것이 없다. 둘은 자기를 위하고 남을 위하는 도이다.
47.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함'을 어찌 '인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는가? 배우는 자가 생각하여 얻어야 한다. 이를 알면 곧 위아래로 꿰뚫는 도이다.
48. 넓되 굳세지 않으면 서기 어렵고, 굳세되 넓지 않으면 거할 데가 없다.
49.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옛 배우는 자는 넉넉하고 흡족하여 선후의 차례가 있었다. 지금 배우는 자는 도리어 다만 한바탕 말로만 삼아 높음을 힘쓸 뿐이다. 나는 늘 두원개(杜元凱, 두예)의 말을 사랑하니 '강해(江海)의 적심과 기름진 윤택함 같아서 환연(渙然)히 얼음 녹듯 하고 이연(怡然)히 이치가 순해진 뒤에 얻음이 된다'고 하였다. 지금 배우는 자는 왕왕 자유(子游)·자하(子夏)를 작게 여겨 배울 것이 못 된다 한다. 그러나 자유·자하의 한 말 한 일이 도리어 모두 실(實)하다. 후세의 배우는 자는 높음을 좋아함이 사람이 마음을 천 리 밖에 노닐게 하나 제 몸은 도리어 다만 여기 있는 것과 같다.
50. 수양(脩養)으로 수명을 늘리는 까닭, 국조(國祚)로 하늘에 영명(永命)을 비는 까닭, 보통 사람이 성현에 이르는 까닭은 모두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면 이러한 응함이 있는 것이다.
51. 충서(忠恕)는 공평(公平)한 까닭이니, 덕을 이룸은 충서로부터요 그 이름은 곧 공평이다.
52. 인(仁)의 도는 요컨대 다만 '공(公)' 한 자를 말할 뿐이다. 공은 다만 인의 이치이니 공을 곧 인이라 부를 수는 없다. 공을 사람으로 체득하므로 인이 된다. 다만 공정하면 사물과 내가 함께 비추어진다. 그러므로 인이 능히 서(恕)하고 능히 사랑한다. 서는 인의 베풂이요 사랑은 인의 용(用)이다.
53. 지금 학문하는 자는 산기슭에 오르는 것과 같다. 그 비스듬할 때는 활보(闊步)하지 않음이 없으나, 가파른 곳에 이르면 곧 그친다. 모름지기 강결(剛決)하고 과감(果敢)히 나아가야 한다.
54. 사람이 '힘써 행하라'고 함도 다만 천근(淺近)한 말이다. 사람이 이미 알아 모든 일이 다 마땅히 할 바임을 보면, 굳이 마음 둠[著意]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막 마음을 두면 곧 하나의 사심(私心)이 있는 것이다. 이 한 점 의기(意氣)가 몇 때나 가겠는가!
55. 알면 반드시 좋아하고, 좋아하면 반드시 구하며, 구하면 반드시 얻는다. 옛사람의 이 배움은 종신(終身)의 일이다. 과연 능히 엎어지고 급한 때에도 반드시 이에 한다면, 어찌 도리를 얻지 못함이 있겠는가?
56. 옛 배우는 자는 하나요, 지금 배우는 자는 셋이니 이단(異端)은 끼지 않는다. 첫째는 문장(文章)의 학(學)이요, 둘째는 훈고(訓詁)의 학이며, 셋째는 유자(儒者)의 학이니, 도에 나아가려면 유자의 학을 버리고는 안 된다.
57. 글 짓는 것이 도를 해치는가를 물었다. 답하였다. 해친다. 무릇 글을 지음에 오로지 뜻하지 않으면 공교롭지 못하고, 오로지 뜻하면 뜻이 여기에 국한되니 또 어찌 천지와 그 큼을 함께하겠는가? 《서경》에 '사물에 빠져 뜻을 잃는다'고 하였으니, 글을 지음도 사물에 빠짐이다. 여여숙(呂與叔)이 시에 '배움이 원개(두예)처럼 되어 비로소 벽(癖)을 이루고, 문장이 상여(사마상여)를 닮아 거의 광대 같네. 공자 문하에 홀로 서서 한 일이 없으니, 다만 안씨가 심재(心齋)를 얻음만 못하네'라고 하였으니, 이 시가 매우 좋다. 옛 배우는 자는 오직 정성(情性) 기름을 힘쓰고 그 밖은 배우지 않았다. 지금 글 짓는 자는 오로지 장구(章句)를 힘써 남의 이목을 기쁘게 한다. 이미 남 기쁘게 함을 힘쓰니 광대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었다. 옛 배우는 자는 글을 지었는가? 답하였다. 사람들이 육경(六經)을 보고 성인도 글을 지었다 하나, 성인도 가슴속에 쌓은 바를 펴내어 절로 글을 이루었을 뿐임을 모른다. 이른바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다'는 것이다. 물었다. 자유·자하가 문학(文學)으로 일컬어짐은 어째서인가? 답하였다. 자유·자하도 어찌 일찍이 붓을 잡아 사장(詞章)을 배웠겠는가? 또 '천문(天文)을 관찰하여 때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를 화성(化成)한다' 함이 어찌 사장의 글이겠는가.
58. 함양(涵養)은 모름지기 경(敬)을 쓰고, 진학(進學)은 곧 치지(致知)에 있다.
59. 제일등(第一等)은 남에게 사양하고 우선 제이등(第二等)을 하겠다 말하지 말라. 이같이 말하면 곧 스스로 버림이다. 비록 인에 거하고 의를 따르지 못하는 자와 등급은 다르나 그 스스로 작게 함은 하나이다. 배움을 말하면 곧 도로 뜻을 삼고, 사람을 말하면 곧 성인으로 뜻을 삼아야 한다.
60. 물었다.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데 경(敬)을 써야 합니까? 답하였다. 경은 함양의 한 가지 일이다. '반드시 일삼음이 있음'에는 모름지기 의를 모음[集義]을 써야 한다. 다만 경을 쓸 줄만 알고 의 모을 줄 모르면 도리어 모두 일이 없게 된다. 또 물었다. 의가 이치에 맞음[中理]이 아닙니까? 답하였다. 이치에 맞음은 일에 있고 의는 마음에 있다.
61. 물었다. 경과 의가 어떻게 다릅니까? 답하였다. 경은 다만 자기를 지키는 도요, 의는 곧 옳음과 그름이 있음을 안다. 이치를 따라 행함이 의가 된다. 만약 다만 하나의 경만 지키고 의 모을 줄 모르면 도리어 모두 일이 없게 된다. 가령 효(孝)를 하려 함에 다만 하나의 효 자만 지켜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효하는 도, 모시고 봉양함을 어떻게 할지, 따뜻하게 하고 시원하게 함을 어떻게 할지를 안 뒤에 효도를 다할 수 있다.
62.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실(實)을 힘쓰고 이름에 가까이하려 하지 않아야 비로소 옳다. 이름에 가까이할 뜻이 있으면 곧 거짓이다. 큰 근본을 이미 잃으면 다시 무슨 일을 배우겠는가? 이름을 위함과 이익을 위함이 맑고 흐림은 비록 같지 않으나 그 이심(利心)은 하나이다.
63. 안회(顔回)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인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다만 털끝만 한 사의(私意)도 없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사의가 있으면 곧 불인(不仁)이다.
64. '인자는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음을 뒤로 한다.' 하려는 바가 있어 하면 모두 얻음을 먼저 함이다. 옛사람은 오직 인을 할 줄만 알았는데 지금 사람은 모두 얻음을 먼저 한다.
65. 성인이 되기를 구하는 뜻이 있은 뒤에야 더불어 함께 배울 수 있다. 배워서 잘 생각한 뒤에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있다. 생각하여 얻은 바가 있으면 더불어 설 수 있다. 서서 화(化)하면 더불어 권도(權)를 행할 수 있다.
66. 옛 배우는 자는 자기를 위하여 마침내 사물을 이룸에 이르고, 지금 배우는 자는 사물을 위하여 마침내 자기를 잃음에 이른다.
67. 군자의 배움은 반드시 날로 새롭다. 날로 새로움은 날로 나아감이다. 날로 나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날로 물러난다. 나아가지 않고도 물러나지 않는 자는 없다. 오직 성인의 도만이 나아가고 물러남이 없으니 그 이른 바가 지극하기 때문이다.
68.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행실이 고요한 자가 배울 수 있다.
69. 넓되 굳세지 않으면 규구(規矩)가 없고, 굳세되 넓지 않으면 좁고 누추하다.
70. 성(性)이 선함을 알아 충신을 근본으로 삼음, 이것이 먼저 그 큰 것을 세움이다.
71.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사람이 편안하고 무거우면 배움이 견고하다.
72.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고 독실히 행함, 이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폐하면 배움이 아니다.
73. 장사숙(張思叔)이 청하여 물음에 그 논(論)이 혹 너무 높았다. 이천이 답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 말하였다. 높이 쌓음은 반드시 아래로부터 한다.
74.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사람의 배움은 먼저 표준(標準) 세움을 꺼린다. 만약 순순히 그치지 않으면 절로 이르는 바가 있을 것이다.
75. 윤언명(尹彦明)이 이천을 본 뒤 반년 만에 비로소 《대학》과 《서명(西銘)》을 보게 되었다.
76. 어떤 이가 '무심(無心)'을 말하였다. 이천이 말하였다. 무심은 곧 옳지 않으니, 다만 '무사심(無私心, 사심이 없음)'이라 해야 한다.
77. 사현도(謝顯道)가 이천을 뵈었다. 이천이 말하였다. 요즈음 일이 어떠한가? 답하였다.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이천이 말하였다. 옳기는 이 이치가 있어 옳으나, 그대는 도리어 발설(發說)함이 너무 이르다. 이천은 참으로 사람을 단련시킬 줄 알았다. 말하고 나서 또 '꼭 알맞게 공부를 더하라'고 하였다.
78. 사현도가 말하였다. 옛날 백순(伯淳, 명도)이 가르칠 때, 다만 그 언어에만 집착하였다. 백순이 말하였다. 그대와 말함은 도리어 취한 사람을 부축하는 것과 같아, 한쪽을 구하면 한쪽이 넘어진다. 다만 사람이 한쪽에 집착할까 두렵다.
79. 횡거 선생이 말하였다. '의를 정밀히 하여 신묘함에 듦[精義入神]'은 안에서 미리 함이 밖을 이롭게 하기를 구함이요, '쓰임을 이롭게 하여 몸을 편안히 함[利用安身]'은 본래 밖을 이롭게 함이 안의 기름을 이룸이다. '신묘함을 궁구하여 화함을 앎[窮神知化]'은 곧 기름이 성하여 절로 이름이요 생각과 힘씀으로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덕을 높이는 것 밖에 군자가 혹 치지(致知)함이 없다.
80. 형체가 있은 뒤에 기질(氣質)의 성(性)이 있다. 잘 돌이키면 천지(天地)의 성이 보존된다. 그러므로 기질의 성을 군자는 성으로 여기지 않는 바가 있다.
81. 덕이 기(氣)를 이기지 못하면 성명(性命)이 기에 달리고, 덕이 그 기를 이기면 성명이 덕에 달린다. 이치를 궁구하고 성을 다하면 성이 천덕(天德)이요 명이 천리(天理)이다. 기에서 한 번 변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사생(死生)과 수요(脩夭)뿐이다.
82. 하늘 아님이 없다. 양명(陽明)이 이기면 덕성(德性)이 쓰이고, 음탁(陰濁)이 이기면 물욕(物欲)이 행해진다. '악을 다스리고 좋음을 온전히 함'은 반드시 배움으로 말미암을 것이다!
83. 그 마음을 크게 하면 천하의 사물을 체득할 수 있다. 사물에 체득되지 못함이 있으면 마음에 밖이 있는 것이다. 세인(世人)의 마음은 견문(見聞)의 좁음에 그친다. 성인은 성을 다하여 견문으로 그 마음을 질곡하지 않는다. 그 천하를 봄에 한 사물도 내가 아님이 없다. 맹자가 '마음을 다하면 성을 알고 하늘을 안다'고 함이 이로써이다. 하늘은 커서 밖이 없으므로 밖이 있는 마음은 하늘의 마음에 합하기에 부족하다.
84. 중니가 네 가지를 끊음[絶四]은, 처음 배움에서 덕을 이룸까지 두 끝[兩端]을 다한 가르침이다. 의(意)는 사사로운 생각이 있음이요, 필(必)은 기대함이 있음이며, 고(固)는 화(化)하지 않음이요, 아(我)는 방소(方所)가 있음이다.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있으면 천지와 더불어 서로 같지 않게 된다.
85. 위로 통달함[上達]은 천리(天理)로 돌이킴이요, 아래로 통달함[下達]은 인욕(人欲)을 좇음일 것이다.
86. 앎이 높음[知崇]은 하늘이요 형이상(形而上)이다. 낮과 밤을 통하여 알면 그 앎이 높다. 앎이 미치되 예(禮)로 성(性)으로 삼지 않으면 자기에게 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를 알아 성을 이루면 도의(道義)가 나오니, 천지가 자리하여 역(易)이 행해짐과 같다.
87. 곤궁[困]이 사람을 나아가게 함은, 덕을 분별함이 되고 감응을 빠르게 함이 된다. 맹자가 '사람이 덕혜(德慧)와 술지(術智)가 있음은 늘 우환과 질병에 있다'고 함이 이로써이다.
88. 말에는 가르침이 있고 움직임에는 법도가 있으며, 낮에는 함이 있고 밤에는 얻음이 있으며, 숨 쉼에는 기름이 있고 눈 깜박임에는 보존함이 있다.
89. 횡거 선생이 「정완(訂頑)」(서명)을 지어 말하였다. 건(乾)을 아버지라 하고 곤(坤)을 어머니라 한다. 나 이렇게 작은 것이 그 가운데 섞여 처한다. 그러므로 천지에 가득 찬 것이 나의 몸[體]이요, 천지를 이끄는 것이 나의 성(性)이다.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요 만물은 나의 무리[與]이다. 대군(大君)은 나의 부모의 종자(宗子)요, 그 대신(大臣)은 종자의 가상(家相)이다. 높은 연배를 높임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는 까닭이요, 외롭고 약한 이를 사랑함은 그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접하는 까닭이다. 성인은 그 덕을 합한 자요, 현인은 그 빼어난 자이다. 무릇 천하의 노쇠하고 병들고 불구이고 외롭고 홀로이고 홀아비·과부인 자가 모두 나의 형제로서 곤궁하되 호소할 데 없는 자이다. 때로 이를 보존함은 자식의 공경[翼]이요,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음은 순수한 효(孝)이다. 어김을 패덕(悖德)이라 하고, 인을 해침을 적(賊)이라 한다. 악을 돕는 자는 재주 없는 자요, 그 형(形)을 실천하는 자만이 닮은 자이다. 화(化)함을 알면 그 일을 잘 이음이요, 신묘함을 궁구하면 그 뜻을 잘 이음이다. 방구석에 부끄럽지 않음이 욕됨 없음이요,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름이 게으르지 않음이다. 맛있는 술을 미워함은 숭백(崇伯)의 아들(우임금)이 봉양을 돌아봄이요, 영재(英才)를 기름은 영봉인(潁封人)이 같은 무리에 베풂이다. 수고로움을 늦추지 않아 기쁨에 이르게 함은 순임금의 공이요, 피할 데 없이 삶김을 기다림은 신생(申生)의 공순함이다. 받은 것을 체득하여 온전히 돌아간 자는 증삼이요, 좇음에 용감하여 명령에 순응한 자는 백기(伯奇)이다. 부귀와 복택(福澤)은 장차 나의 삶을 두텁게 함이요, 빈천과 우척(憂戚)은 너를 옥(玉)처럼 다듬어 이루게 함이다. 살아서는 내가 순순히 섬기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다.
또 「폄우(砭愚)」(동명)를 지어 말하였다. 농담은 생각에서 나오고 장난은 꾀함에서 나온다. 소리에 발하고 사지에 드러나는 것을 자기 마음이 아니라 함은 밝지 못함이요, 남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기를 바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릇된 말은 마음이 아니요 그릇된 행동은 성(誠)이 아니라 하여, 소리에 잘못되고 사체에 어지러이 미혹되고도 자기가 마땅하다 하면 스스로 속임이요, 남이 자기를 따르기를 바라면 남을 속임이다. 혹 마음에서 나온 것을 자기 농담으로 돌려 허물하고, 생각에서 잘못된 것을 자기 성실로 스스로 속이며,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경계할 줄 모르고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으로 허물을 돌린다. 오만을 기르고 또 잘못을 이루니, 지혜롭지 못함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90. 장차 자기를 닦으려면 반드시 먼저 후중(厚重)함으로 스스로 지녀야 한다. 후중하면 배움을 알아 덕이 곧 나아가 고집되지 않는다. 충신으로 덕에 나아감은 오직 벗을 높이고 어진 이를 급히 함이다. 자기보다 나은 자가 친하기를 바람은 잘못 고치기를 인색하지 않음만 한 것이 없다.
91. 횡거 선생이 범손지(范巽之)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함은 병의 근원이 어디 있는가? 손지가 청하여 물었다. 선생이 말하였다. 이는 깨닫기 어렵지 않다. 이 말을 한 까닭은 대개 배우는 자가 뜻을 보존하여 잊지 않으면, 거의 마음이 노닐어 점차 익어 어느 날 훌쩍 큰 잠에서 깨어난 듯함을 바라서이다.
92. 마음 세움을 알지 못하면 생각이 많아 의심을 이룸을 미워하고, 이미 설 바를 알면 강구(講究)와 다스림이 정밀하지 못함을 미워한다. 강구하고 다스리는 생각이 도술(道術) 안 아님이 없으니, 비록 부지런한들 어찌 싫어하겠는가! 그러므로 욕구할 만한 것에 급함은 나의 마음을 의심 없는 경지에 세우기를 구함이다. 그런 뒤에 강하(江河)를 터놓듯 나의 나아감을 이롭게 한다. '이 뜻을 겸손히 하고 때맞춰 민첩하기를 힘쓰면 그 닦임이 온다.' 비록 중니의 재주와 아름다움으로도 또한 민첩히 구하였다. 이제 미치지 못하는 자질을 가지고 천천히 그 절로 알맞기를 들으려 함은 들은 바가 아니다.
93. 선을 밝힘이 근본이다. 굳게 잡으면 서고, 채워 넓히면 커지며, 쉽게 보면 작아진다. 사람이 능히 넓힐 뿐이다.
94. 이제 다만 '덕성을 높이고 학문으로 말미암음[尊德性而道問學]'으로 마음을 삼아, 날로 스스로 학문에 등진 바가 있는가, 덕성에 게으른 바가 있는가를 구하라. 이 뜻이 또한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 단속함', '아래로 배워 위로 통달함'이니, 이로써 일 년을 경책하면 어찌 자라지 않겠는가? 매일 모름지기 다소간 유익함을 구하라. 없는 바를 알고 조금이라도 불선(不善)을 고침, 이는 덕성상의 유익함이다. 책을 읽어 의리를 구하고, 책을 엮을 때 모름지기 이회하여 귀착할 데가 있게 하며 헛되이 베껴 지나치지 말고, 또 옛말과 지난 행실을 많이 알라. 이는 학문상의 유익함이다. 잠깐의 사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날마다 이같이 삼 년을 하면 거의 나아감이 있을 것이다.
95.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도(道)를 세우며, 가신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연다.
96. 내(장재)가 배우는 자로 하여금 먼저 예(禮)를 배우게 하는 까닭은, 다만 예를 배우면 곧 세속의 한 벌[一副當]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익숙히 얽힘은 비유하면 뻗어 나가는 덩굴 같으니, 얽힘을 풀면 곧 위로 올라간다. 진실로 한 벌을 제거하면 세속의 습관이 곧 자연히 벗겨진다. 또 예를 배우면 지킴을 정하게 할 수 있다.
97. 모름지기 마음을 너그럽고 시원하게 풀어 공평히 구해야 곧 도를 볼 수 있다. 하물며 덕성은 절로 광대하다. 역에 '신묘함을 궁구하고 화함을 앎이 덕의 성함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얕은 마음으로 얻을 수 있겠는가?
98. 사람이 흔히 노성(老成)함으로 아래에 묻기를 즐기지 않아 종신토록 알지 못한다. 또 남이 도의(道義)로 선각(先覺)이라 대접함으로 다시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 할 수 없다 하여 또한 아래에 묻기를 즐기지 않는다. 묻기를 즐기지 않음을 좇아 마침내 온갖 속임과 망령과 인아(人我)의 다툼을 내어, 차라리 종신토록 알지 못한다.
99. 많이 듣는 것으로 천하의 일을 다하기에는 부족하다. 진실로 많이 듣는 것으로 천하의 변(變)을 대하면, 도가 일찍이 안 바에는 갚을 수 있으나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협박하면 곧 막힌다.
100. 학문의 큰 유익함은 스스로 기질을 변화시킴을 구함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남을 위하는 폐단이 되어, 마침내 발명(發明)하는 바가 없어 성인의 깊음을 보지 못한다.
101. 글[文]은 정밀히 살펴야 하고 마음[心]은 크게 풀어야 한다.
102. 의심할 줄 모르는 자는 다만 실제로 행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실제로 행하면 모름지기 의심이 있다. 반드시 행해지지 않는 곳이 있음이 의심이다.
103. 마음이 크면 온갖 사물이 모두 통하고, 마음이 작으면 온갖 사물이 모두 병든다.
104. 사람이 비록 공(功)이 있어도 배움에 미치지 못하면 마음을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마음이 진실로 잊지 않으면, 비록 인사(人事)를 접하여도 곧 실행(實行)이니 도 아님이 없다. 마음이 만약 잊으면 종신토록 말미암아도 곧 속된 일이다.
105. 안과 밖을 합하고 사물과 나를 평등히 함, 이것이 도의 큰 단서를 봄이다.
106. 이미 배우면서 먼저 공업(功業)으로 뜻을 삼는 자는 배움에 곧 서로 해친다. 이미 뜻이 있으면 반드시 천착하고 창의(創意)하여 일거리를 일으킨다. 덕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먼저 공업을 일삼음은 큰 목수를 대신해 깎는 것이니, 손 다치지 않는 자가 드물다.
107. 내(장재)가 일찍이 공자·맹자가 돌아가신 뒤 여러 유자(儒者)가 시끄러워, 간략히 돌이켜 근원을 궁구할 줄 모르고 구차히 짓기에 용감함을 병으로 여겼다. 미치지 못하는 자질을 가지고 후세에 알려지기를 급히 하니, 밝은 자가 한번 보면 폐와 간을 보듯 한다. 그 분량을 알지 못함을 많이 볼 뿐이다. 바야흐로 그 폐단을 경계하여 묵묵히 나의 성(誠)을 기르고, 다만 날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것을 함을 이루지 못함을 근심한다.
108. 배움이 이르지 못하고서 변(變)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끝내 우환이 있을 줄 안다. 대개 변은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만약 갑자기 변을 말하면 잡은 방법[操術]이 이미 바르지 못함을 안다.
109. 무릇 일이 가려져 바닥을 보지 못함은 다만 유익함을 구하지 않음이다. 어떤 이가 그 도의(道義)를 말하기를 즐기지 않으면 얻은 바와 이른 바를 바닥까지 볼 수 없다. 또 '말이 없되 말하지 않음이 없음'도 아니다.
110. 귀와 눈이 밖에 부려진다. 바깥일을 잡는 자는 실은 스스로 게을러 스스로 다스리기를 즐기지 않음이다. 다만 장단(長短)을 말하고 자기에게 돌이키지 못하는 자이다.
111. 배우는 자는 크든 작든 뜻을 작게 하고 기(氣)를 가벼이 해서는 안 된다. 뜻이 작으면 쉽게 만족하고, 쉽게 만족하면 나아갈 까닭이 없다. 기가 가벼우면 아직 모르는 것을 이미 안다 하고 아직 배우지 않은 것을 이미 배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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