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 07 출처(出處)
권7 「출처(出處)」는 모두 39조로, 나아가고 물러나는 도[出處之道]를 논한다. 몸이 이미 닦이고 집안이 이미 가지런해지면 벼슬할 수 있으나, 그 뒤의 거취(去就)와 취사(取舍)는 오직 의(義)를 좇아 마땅히 살펴 처리해야 한다. 빈천에 편안하고 부귀를 가벼이 하며, 의리와 이욕(利欲)을 분별하는 선비의 출처관이 핵심이다.
번역
출처(出處) (주: 모두 39조이다.)
이 권은 나아가고 물러나는 도를 논한다. 대개 몸이 이미 닦이고 집안이 이미 가지런해지면 벼슬할 수 있다. 그런 뒤에 거취와 취사를 오직 의를 좇아 마땅히 살펴 처리해야 한다.
1.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어진 이가 아래에 있으면서 어찌 스스로 나아가 임금에게 구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스스로 구하면 반드시 능히 믿어 쓰일 이치가 없다. 옛사람이 반드시 임금이 경(敬)을 다하고 예(禮)를 다하기를 기다린 뒤에 간 까닭은 스스로 존대(尊大)하려 함이 아니다. 대개 그 덕을 높이고 도를 즐기는 마음이 이같지 않으면 함이 있기에 부족해서이다.
2. 군자가 때를 기다림은 안정(安靜)히 스스로 지켜, 뜻은 비록 기다림이 있어도 편안하여 장차 종신토록 할 듯이 함이니, 곧 떳떳함을 쓸 수 있다. 비록 나아가지 못하여도 뜻이 움직이는 자는 그 떳떳함에 편안하지 못함이다.
3. 비괘(比卦)는 길하니, 근원을 점쳐 으뜸이고 영구하고 바르면 허물이 없다. 전(傳)에 말하였다. 사람이 서로 친비(親比)함은 반드시 그 도가 있다. 진실로 그 도가 아니면 뉘우침과 허물이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근원을 미루어 그 친비할 만한가를 점쳐 결정하여 친비한다. 친비함이 으뜸이고 영구하고 바름을 얻으면 허물이 없다. 으뜸[元]은 군장(君長)의 도가 있음을 이르고, 영구함[永]은 항구할 수 있음을 이르며, 바름[貞]은 바른 도를 얻음을 이른다. 위에서 아래를 친비함에 반드시 이 셋이 있어야 하고, 아래에서 위를 따름에 반드시 이 셋을 구해야 곧 허물이 없다.
4. 이괘(履卦)의 초구(初九)에 '본디대로[素] 밟아 가면 허물이 없다'고 하였다. 전에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 능히 빈천(貧賤)의 본분에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면, 그 나아감이 곧 탐하고 조급하게 움직여 빈천을 벗어나기를 구할 뿐 함이 있고자 함이 아니다. 이미 그 나아감을 얻으면 교만하고 넘침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가면 허물이 있다. 어진 이는 곧 그 본디를 편안히 밟는다. 그 처함이 즐겁고 그 나아감은 장차 함이 있으려 함이다. 그러므로 그 나아감을 얻으면 함이 있어 선하지 않음이 없다. 만약 귀해지려는 마음과 도를 행하려는 마음이 속에서 서로 싸우면 어찌 능히 그 본디를 편안히 밟겠는가?
5. 대인(大人)이 비색(否塞)한 때에 그 바른 절개를 지켜 소인의 무리에 섞여 어지럽지 않으면, 몸은 비록 비색하나 도는 형통하다. 그러므로 '대인은 비색하여도 형통하다'고 하였다. 도가 아니고서 몸이 형통하면 곧 도가 비색함이다.
6. 사람이 따르는 바는 바름을 얻으면 삿됨을 멀리하고, 그름을 좇으면 옳음을 잃는다. 둘 다 좇을 이치가 없다. 수괘(隨卦) 육이(六二)는 진실로 초(初)에 매이면 오(五)를 잃는다. 그러므로 상(象)에 '둘 다 함께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이 바름을 좇아 마땅히 전일(專一)해야 함을 경계한 것이다.
7. 군자가 귀히 여기는 바는 세속(世俗)이 부끄러워하는 바요, 세속이 귀히 여기는 바는 군자가 천히 여기는 바이다. 그러므로 '그 발을 꾸밈에 수레를 버리고 걷는다'고 하였다.
8. 고괘(蠱卦)의 상구(上九)에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고상(高尚)히 한다'고 하였다. 상에 '왕후를 섬기지 않으니 뜻이 본받을 만하다'고 하였다. 전에 말하였다. 선비가 스스로 고상함도 한 가지 길이 아니다. 도덕을 품고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결(高潔)히 스스로 지키는 자가 있고, 그칠 줄 알고 족함을 아는 도로 물러나 스스로 보존하는 자가 있으며, 능력을 헤아리고 분수를 헤아려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음에 편안한 자가 있고, 청개(淸介)히 스스로 지켜 천하의 일을 달가워하지 않고 홀로 그 몸을 깨끗이 하는 자가 있다. 처한 바가 비록 득실(得失)·소대(小大)의 다름이 있으나 모두 스스로 그 일을 고상히 하는 자이다. 상에 이른바 '뜻이 본받을 만하다'는 것은 '나아가고 물러남이 도에 합함'이다.
9. 둔괘(遯卦)는 음(陰)이 처음 자라남이다. 군자가 기미를 알므로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성인의 뜻은 곧 갑자기 그만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때와 더불어 행하면 조금 이롭고 바르다'는 가르침이 있다. 성현(聖賢)이 천하에 대하여 비록 도가 장차 폐할 줄 알아도 어찌 그 어지러움을 앉아서 보고 구하지 않으려 하겠는가? 반드시 구구히 극에 이르지 않은 사이에 힘을 다해, 이 쇠함을 강하게 하고 저 나아감을 어렵게 한다. 그 잠시의 편안함을 도모하여 진실로 할 수 있으면 함은 공·맹이 달가이 여긴 바이다. 왕윤(王允)과 사안(謝安)이 한(漢)·진(晉)에 대함이 이것이다.
10. 명이괘(明夷卦)의 초구(初九)는 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고 처함이 매우 어려우니, 기미를 보는 밝음이 아니면 능하지 못하다. 이같으면 세속이 누가 의심하고 괴이히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군자는 세속의 괴이히 여김으로 그 행함을 머뭇거리며 의심하지 않는다. 만약 뭇사람이 다 알기를 기다리면 상함이 이미 미쳐 떠날 수 없다!
11. 진괘(晉卦)의 초육(初六)은 아래에 있으면서 처음 나아감이니, 어찌 갑자기 능히 위에 깊이 신임을 보겠는가? 진실로 위에서 아직 신임을 보지 못하면 마땅히 가운데서 편안히 스스로 지켜 옹용(雍容)하고 관유(寬裕)하게 하여, 위의 신임을 구함에 급하지 않아야 한다. 진실로 신임받으려는 마음이 간절하면, 급급히 그 지킴을 잃지 않으면 발끈하여 의(義)를 상한다. 그러므로 '나아가는 듯 꺾이는 듯하나 바르면 길하다. 믿어 주지 않아도 너그러우면 허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인이 또 후세 사람이 관유의 뜻에 통달하지 못하여, 자리에 거한 자가 직분을 폐하고 지킴을 잃음을 너그러움으로 여길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특별히 '초육은 너그러우면 허물이 없다'고 한 것은, 처음 나아가 아직 명(命)을 받아 직임을 맡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관수(官守)가 있는데 위에 신임받지 못하여 그 직분을 잃으면 하루도 거할 수 없다.
12. 바르지 않게 합함은 오래되어 떠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바른 도로 합하면 절로 끝내 어그러질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어진 이는 이치를 따라 편안히 행하고, 지혜로운 이는 기미를 알아 굳게 지킨다.
13. 군자가 곤궁(困窮)한 때를 당하여 이미 그 막고 염려하는 도를 다하고도 면치 못하면 곧 명(命)이다. 마땅히 그 명을 미루어 그 뜻을 이루어야 한다. 명이 마땅히 그러함을 알면 곤색(困塞)과 화환(禍患)으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나의 의(義)를 행할 뿐이다. 진실로 명을 알지 못하면 험난(險難)에 두려워하고 곤궁에 좌절하여 지키는 바를 잃을 것이니, 어찌 그 선을 하려는 뜻을 이루겠는가?
14. 가난한 선비의 아내, 약한 나라의 신하는 각기 그 바름에 편안할 뿐이다. 진실로 형세를 가려 좇으면 큰 악(惡)이라 세상에 용납되지 못한다.
15. 정괘(井卦)의 구삼(九三)은 우물을 쳐 다스렸으되 먹히지 못함이니, 곧 사람이 재지(才智)가 있으되 쓰이지 못하여, 행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슬퍼함이다. 대개 굳세되 중(中)이 아니므로 베풀어 행함에 절실하니, '쓰면 행하고 버리면 감춘다'는 것과 다르다.
16. 혁괘(革卦)의 육이(六二)는 중정(中正)하면 치우치고 가림이 없고, 문명(文明)하면 사리(事理)를 다하며, 위에 응하면 권세를 얻고, 순함을 체득하면 어그러짐이 없다. 때가 옳고 자리를 얻고 재주가 족하니, 변혁[革]에 처함의 지극히 선한 자이다. 반드시 위아래의 신임을 기다리므로 '날이 지난 뒤에 변혁한다'고 하였다. 육이의 재덕(才德) 같으면 마땅히 나아가 그 도를 행해야 곧 길하고 허물이 없다. 나아가지 않으면 할 만한 때를 잃어 허물이 있게 된다.
17. 정괘(鼎卦)에 실(實)이 있음은 곧 사람이 재업(才業)이 있음이다. 마땅히 향하는 바를 삼가야 한다. 가는 바를 삼가지 않으면 또한 의롭지 않음에 빠진다. 그러므로 '솥에 실(實)이 있으니 가는 바를 삼가라'고 하였다.
18. 선비가 높은 자리에 처하면 건짐[拯]만 있고 따름[隨]은 없다. 아래 자리에 있으면 마땅히 건질 것이 있고 마땅히 따를 것이 있으며, 건지지 못한 뒤에 따른다.
19. '군자는 생각이 그 자리[位]를 벗어나지 않는다.' 자리란 처한 바의 분수이다. 만사(萬事)가 각기 그 처소가 있다. 그 처소를 얻으면 그쳐 편안하다. 만약 마땅히 행할 것을 그치고, 마땅히 빠를 것을 오래 하면, 혹 지나치고 혹 미치지 못함이 모두 그 자리를 벗어남이다. 하물며 분수를 넘어 근거 아닌 것을 차지함이랴?
20. 사람의 그침[止]은 오래 끝맺기 어려우므로, 절개가 혹 만년에 옮겨지고, 지킴이 혹 끝에 잃어지며, 일이 혹 오래되어 폐해진다. 사람이 함께 근심하는 바이다. 간괘(艮卦)의 상구(上九)는 끝에 돈후(敦厚)하니 그침의 도의 지극히 선함이다. 그러므로 '돈독히 그치면 길하다'고 하였다.
21. 중부괘(中孚卦)의 초구(初九)에 '헤아리면 길하다'고 하였다. 상에 '뜻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전에 말하였다. 믿음의 처음을 당하여 뜻이 아직 좇는 바가 없어 믿을 바를 헤아리면 그 바름을 얻으니, 이로써 길하다. 뜻이 좇는 바가 있으면 곧 변동(變動)이라 헤아려도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22. 어진 이는 오직 의(義)를 알 뿐이니 명(命)이 그 가운데 있다. 중인(中人) 이하는 곧 명으로 의를 처리한다. 가령 '구함에 도가 있고 얻음에 명이 있다'고 함은 구함이 얻음에 무익함이다. 명을 구할 수 없음을 알므로 스스로 구하지 않음으로 처한다. 어진 이 같으면 도로 구하고 의로 얻으니 굳이 명을 말할 것이 없다.
23. 사람이 환난(患難)에 대하여 오직 하나의 처치(處置)가 있을 뿐이다. 사람의 꾀를 다한 뒤에 도리어 모름지기 태연히 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한 일을 만나면 마음마다 생각마다 버리려 하지 않으니, 필경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만약 처치할 줄 알아 놓아 버리지 못하면 곧 '의(義)도 없고 명(命)도 없음'이다.
24. 문인 중에 태학(太學)에 거하다가 돌아가 향거(鄕舉)에 응하려는 자가 있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채(蔡) 지방 사람은 《대기(戴記)》를 익힌 이가 적어 과거 급제[決科]에 이롭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였다. 너의 이 마음은 이미 요순(堯舜)의 도에 들 수 없다. 무릇 자공(子貢)의 높은 직(職)이 어찌 일찍이 화리(貨利)에 구구하였겠는가? 풍약(豐約) 사이에 마음 둠[留情]을 없앨 수 없었을 뿐이다. 또 빈부(貧富)는 명(命)이 있다. 저(자공)는 곧 그 사이에 마음을 두었으니, 도를 통하지 못함을 많이 본다. 그러므로 성인이 그를 '명을 받지 않았다[不受命]'고 일렀다. 도에 뜻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이 마음을 제거한 뒤에 더불어 말할 수 있다.
25. 사람이 진실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이 있으면, 곧 하루도 편안하지 못한 바에 편안하려 하지 않는다. 어찌 하루뿐이겠는가? 잠깐도 능히 못한다. 증자(曾子)가 자리를 바꿈[易簀] 같으니, 모름지기 이같이 해야 곧 편안하다. 사람이 능히 이같이 못하는 것은 다만 실리(實理)를 보지 못해서이다. 실리란 실제로 옳음을 보고 실제로 그름을 봄이다. 무릇 실리는 마음에 얻으면 절로 다르다. 만약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자는 마음에 실제로 보지 못함이다. 만약 보면 반드시 편안하지 못한 바에 편안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의 한 몸이 자못 하려 하지 않는 바가 있고, 다른 일에 이르면 또 그렇지 않다. 가령 선비란 비록 죽이면서 담 뚫는 도둑질을 시켜도 반드시 하지 않으나, 다른 일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가령 책 잡은 자가 예의(禮義)를 말할 줄 모름이 없고, 또 왕공대인(王公大人)이 모두 헌면(軒冕, 벼슬)이 외물(外物)임을 말할 수 있으나, 그 이해(利害)에 임하면 의리에 나아갈 줄 모르고 도리어 부귀에 나아간다. 이같은 자는 다만 말함이 실제로 보지 못함이다. 그 물·불을 밟음에 이르면 사람이 모두 피하니, 이는 실제로 봄이다. 모름지기 '불선(不善)을 봄을 끓는 물 만지듯이 하는' 마음이 있어야 곧 자연히 다르다. 옛날 일찍이 호랑이에게 상한 자가 있어, 남이 호랑이를 말하면 비록 세 자 어린아이도 모두 호랑이의 두려워할 만함을 안다. 그러나 끝내 일찍이 상한 자가 신색(神色)이 두려워하여 지성(至誠)으로 두려워함만 못하다. 이는 실제로 봄이다. 마음에 얻음, 이를 덕(德)이 있다 한다. 억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 옛사람이 몸을 던지고 목숨을 버린 자가 있으니, 만약 실제로 보지 못하였다면 어찌 이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모름지기 실제로 보아야 한다. 삶이 의(義)보다 무겁지 않고 삶이 죽음보다 편안하지 않다. 그러므로 '몸을 죽여 인을 이룸'이 있으니, 다만 하나의 옳음을 성취할 뿐이다.
26. 맹자가 순(舜)과 도척(跖)의 구분을 분별함은 다만 의(義)와 이(利)의 사이에 있다. 사이[間]를 말함은 서로 거리가 심히 멀지 않아 다투는 바가 털끝뿐임을 이른다. 의와 이는 다만 공(公)과 사(私)일 뿐이다. 막 의에서 벗어나면 곧 이(利)로 말함이다. 다만 그 계교(計較)함이 곧 이해가 있음을 위함이다. 만약 이해가 없으면 무엇 때문에 계교하겠는가? 이해란 천하의 떳떳한 정[常情]이다. 사람이 모두 이를 좇고 해를 피할 줄 안다. 성인은 곧 다시 이해를 논하지 않고 오직 의가 마땅히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를 볼 뿐이니, 곧 명(命)이 그 가운데 있다.
27. 대저 유자(儒者)가 감히 도에 깊이 나아가기를 바라지 못하더라도, 다만 둔 바[所存]가 바르고 선악을 분별하며 염치(廉恥)를 알게 하라. 이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또한 모름지기 점차 좋아진다.
28. 조경평(趙景平)이 '공자가 이(利)를 드물게 말함'에서 이른바 이(利)란 무슨 이인가를 물었다. 답하였다. 다만 재리(財利)의 이뿐이 아니다. 무릇 이심(利心)이 있으면 곧 안 된다. 가령 한 일을 함에 모름지기 자기의 편안한 곳을 찾음이 모두 이심이다. 성인은 의(義)로 이(利)를 삼으니, 의가 편안한 곳이 곧 이가 된다. 석씨(釋氏)의 학(學) 같음은 모두 이에 근본하므로 곧 옳지 않다.
29. 물었다. 형칠(邢七)이 오래 선생을 좇았는데 생각건대 전혀 지식이 없어 뒤에 매우 낭패하였습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그를 전혀 앎이 없다 함은 옳지 않다. 다만 의리가 능히 이욕(利欲)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곧 이같음에 이른 것이다.
30. 사식(謝湜)이 촉(蜀)에서 경사(京師)로 가는 길에 낙양(洛陽)을 지나며 정자(程子)를 뵈었다. 정자가 말하였다. 너는 장차 어디로 가는가? 답하였다. 장차 교관(敎官) 시험을 보려 합니다. 정자가 답하지 않았다. 사식이 말하였다. 어떻습니까? 정자가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종을 사려고 시험해 보려 하니, 그 어미가 노하여 허락하지 않으며 '내 딸은 시험할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네가 남의 스승 되기를 구하면서 시험을 본다면, 반드시 이 노파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사식이 마침내 가지 않았다.
31. 선생(이천)이 강연(講筵)에 있을 때 일찍이 봉록을 청하지 않았다. 여러 공(公)이 마침내 호부(戶部)에 첩(牒)을 보내, 봉록 돈을 지급하지 않음을 물었다. 호부가 전임(前任)의 역자(歷子, 봉록 문서)를 찾았다. 선생이 말하였다. 나는 초야(草萊)에서 일어나 전임의 역자가 없다. 마침내 호부로 하여금 스스로 권력(券歷)을 만들어 내게 하였다. 또 아내를 위해 봉작(封爵)을 구하지 않았다. 범순보(范純甫)가 그 까닭을 물었다. 선생이 말하였다. 나는 당시 초야에서 일어나 세 번 사양한 뒤에 명을 받았다. 어찌 오늘 곧 아내를 위해 봉작을 구할 이치가 있겠는가? 물었다. 지금 사람이 은례(恩例)를 청하여 비는 것이 의(義)에 마땅합니까? 사람이 모두 본분(本分)으로 여겨 해가 되지 않는다 합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다만 지금 사대부가 하나의 '걸(乞, 빔)' 자를 말하는 데 익숙하여 도리어 걸핏하면 또 빎이다.
32. 한(漢)나라가 현량(賢良)을 책문(策問)함은 오히려 남이 천거함이었다. 공손홍(公孫弘) 같은 자는 오히려 억지로 일으킨 뒤에 곧 대책(對策)에 나아갔다. 후세의 현량에 이르러서는 곧 스스로 천거를 구할 뿐이다. 만약 과연 날이 있어, 내 마음이 다만 정대(廷對)를 바라 천하의 일을 직언(直言)하려 한다면 또한 가상하다. 만약 뜻이 부귀에 있으면 뜻을 얻으면 곧 교만 방종하고, 뜻을 잃으면 곧 방광(放曠)하여 비수(悲愁)할 뿐이다.
33.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흔히 내가 사람에게 거업(舉業, 과거 공부)을 익히게 하지 않는다 하나, 내가 어찌 일찍이 사람에게 거업을 익히게 하지 않았겠는가? 사람이 만약 거업을 익히지 않고 급제(及第)를 바라면 곧 천리(天理)를 책하고 인사(人事)를 닦지 않음이다. 다만 거업이 이미 급제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만약 다시 그 위에서 힘을 다해 반드시 얻을 도를 구하면 이는 미혹(惑)이다.
34. 물었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어 과거에 응하고 벼슬을 구하면 득실(得失)의 누(累)가 없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닦으면 이를 면할 수 있습니까?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이는 다만 뜻[志]이 기(氣)를 이기지 못함이다. 만약 뜻이 이기면 절로 이런 누가 없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면 모름지기 녹사(祿仕, 봉록을 위한 벼슬)를 써야 한다. 그러나 '얻고 얻지 못함은 명(命)이 있다.' 물었다. 자기는 본래 괜찮으나 어버이를 위해서는 어찌합니까? 답하였다. 자기를 위함과 어버이를 위함도 다만 한 가지 일이다. 만약 얻지 못하면 그 명을 어찌하겠는가? 공자가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람이 진실로 명을 알지 못하면 환난을 보면 반드시 피하고, 득실을 만나면 반드시 동요하며, 이익을 보면 반드시 좇으니, 어찌 군자가 되겠는가?
35. 어떤 이가 과거 사업[科舉事業]이 사람의 공(功)을 빼앗는다 하나, 그렇지 않다. 또 한 달 중에 열흘을 거업에 하면 남은 날이 족히 학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이에 뜻을 두지 않으면 반드시 저에 뜻을 둔다. 그러므로 과거의 일은 공을 방해함을 근심하지 않고, 오직 뜻을 빼앗음을 근심한다.
36. 횡거 선생이 말하였다. 세록(世祿)의 영화(榮華)는 왕자(王者)가 공 있는 이를 기록하고 덕 있는 이를 높이는 까닭이다. 사랑하고 두텁게 하여 은우(恩遇)가 다하지 않음을 보인다. 남의 후사(後嗣) 된 자는 마땅히 직분을 즐기고 공을 권면하여 일을 부지런히 맡고, 청렴함을 기르고 이(利)를 멀리하여 세풍(世風)을 이어야 한다. 그런데 근대의 공경(公卿) 자손은 바야흐로 또 아래로 포의(布衣)에 견주어, 성병(聲病, 시문의 격식)을 공교히 하여 유사(有司)에게 팔고, 벼슬 구함이 의롭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이치를 따름을 무능(無能)함으로 부끄러워하며, 음습(蔭襲, 음서로 벼슬 받음)이 영화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헛된 이름[虛名]을 잘 이음으로 여기니,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37. 그 힘을 의뢰하지 않고 그 가진 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으면 곧 남의 세력을 잊을 수 있다.
38. 사람이 흔히 빈천에 편안하다 말하나, 그 실은 다만 꾀가 다하고 힘이 굽어 재주가 짧아 경영하고 도모하지 못함일 뿐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아마 즐겨 편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모름지기 진실로 의리(義理)가 이욕(利欲)보다 즐거움을 안 뒤에야 능하다.
39. 천하의 일에 큰 근심은 다만 남의 비웃음[非笑]을 두려워함이다. 거마(車馬)를 기르지 않고, 거친 밥을 먹고 나쁜 옷을 입으며, 빈천에 거함을 모두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한다. 마땅히 살 때는 살고 마땅히 죽을 때는 죽음을 알지 못한다. 오늘 만종(萬鍾)의 녹이라도 내일 버리고, 오늘 부귀라도 내일 굶주려도 또한 근심하지 않는다. '오직 의(義)가 있는 바'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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