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 13 변이단(辨異端)
《근사록》 권13 「변이단(辨異端)」은 이단(異端)을 분별하는 편이다. 모두 14개 조목으로, 양주·묵적(楊墨)과 신불해·한비(申韓), 특히 불교(佛老)의 해를 분별한다. 군자의 학문이 이미 지극하더라도 이단의 분별은 더욱 밝히지 않을 수 없으니, 여기에 털끝만큼이라도 분별하지 못함이 있으면 인심에 끼치는 해가 심하다는 것이 취지이다.
(주: 이 권은 이단을 분별한다. 군자의 학문이 비록 이미 지극하더라도 이단의 분별은 더욱 밝히지 않을 수 없으니, 진실로 여기에 털끝만큼이라도 분별하지 못함이 있으면 인심에 끼치는 해가 심하다.)
번역
1.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양주·묵적(楊墨)의 해는 신불해·한비(申韓)보다 심하고, 불교·노장(佛老)의 해는 양·묵보다 심하다. 양씨(楊氏)는 자기를 위하니(爲我) 의(義)에 의심스럽고, 묵씨(墨氏)는 두루 사랑하니(兼愛) 인(仁)에 의심스럽다. 신·한은 천박하여 보기 쉬우므로, 맹자가 다만 양·묵을 물리친 것은 그것이 세상을 미혹시킴이 심했기 때문이다. 불·노는 그 말이 이치에 가까워 또 양·묵에 견줄 바가 아니니, 이것이 해가 더욱 심한 까닭이다. 양·묵의 해도 맹자의 물리침을 거쳤으므로 환히 트였다.
2.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유자(儒者)는 정도(正道)에 마음을 잠겨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처음은 매우 미미하나 그 끝은 구할 수 없다. 사(師, 자장)는 지나치고 상(商, 자하)은 미치지 못함과 같이, 성인의 중도(中道)에서 사는 다만 두터움에 조금 지나치고 상은 다만 조금 미치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두터우면 점차 겸애(兼愛)에 이르고 미치지 못하면 곧 위아(爲我)에 이른다. 그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이 같이 유자에게서 나오나 그 끝은 마침내 양·묵에 이른다. 양·묵에 이르러서도 아직 아비 없고 임금 없음(無父無君)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맹자가 미루어 곧 여기에 이른다 하였으니, 대개 그 어긋남이 반드시 여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3.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도의 밖에 물(物)이 없고 물의 밖에 도가 없다. 이는 천지 사이에 어디를 가나 도 아님이 없는 것이다. 곧 부자(父子)이면 부자는 친애하는 데 있고, 곧 군신(君臣)이면 군신은 엄정한 데 있으며, 부부가 되고 장유(長幼)가 되고 붕우가 됨에 이르기까지 하는 바가 도 아님이 없다. 이것이 도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한즉 인륜을 무너뜨리고 사대(四大)를 버리는 것은 그 도에서 멀다. 그러므로 "군자가 천하에 있어 오로지 함도 없고 막음도 없어 의(義)와 더불어 짝한다." 만약 오로지 함이 있고 막음이 있으면 도에 틈이 있어 천지의 온전함이 아니다. 저 석씨(釋氏)의 학문은 "공경으로 안을 곧게 함"은 있으나 "의로 밖을 방정히 함"은 아직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막힌 자는 고고(枯槁)에 들고 트인 자는 방자(恣肆)로 돌아간다.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 좁은 까닭이다. 우리 도는 그렇지 않으니, 성(性)을 따를 따름이다. 이 이치는 성인이 《주역》에 갖추어 말하였다.
4. 석씨는 본래 생사(死生)를 두려워하니 이익을 위함이라, 어찌 공변된 도이겠는가? 오직 위로 통달함(上達)에만 힘쓰고 아래로 배움(下學)이 없으니, 그러면 그 위로 통달한 곳이 어찌 옳음이 있겠는가? 원래 서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끊김이 있으니 도가 아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안다"고 하였다. 저들이 이른바 마음을 알고 성을 본다(識心見性)는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르는(存心養性) 한 가지 일은 없다. 저들은 진실로 출가하여 홀로 선해진다 하나, 곧 도의 본체에 스스로 부족하다. 혹자가 이르기를, "석씨의 지옥 따위는 모두 하근(下根)의 사람을 위해 이 두려움을 베풀어 선을 행하게 함이다." 선생이 이르기를, 지극한 정성은 천지를 꿰뚫어도 사람이 오히려 교화되지 않음이 있거늘, 어찌 거짓 가르침을 세워 사람이 교화될 수 있겠는가?
5. 배우는 자가 석씨의 설에 대해서는, 마땅히 음란한 소리와 아름다운 색을 멀리하듯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빠르게 그 가운데로 들어간다. 안연(顔淵)이 나라 다스림을 물으니, 공자가 이미 이제(二帝)·삼왕(三王)의 일로 일러주고, 다시 정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라 경계하며 "정나라 음악은 음란하고 아첨하는 사람은 위태롭다"고 하였다. 저 아첨하는 사람은 그저 한쪽으로 아첨할 뿐이나 자기에게는 위태로우니, 다만 사람을 옮길 수 있으므로 위태로운 것이다. 우(禹)의 말에 이르러서는, "어찌 교언영색을 두려워하랴?"하였다. 교언영색은 다만 두려워한다 말할 뿐이니, 다만 모름지기 이같이 경계하고 삼가도 오히려 면치 못할까 두렵다. 석씨의 학문은 다시 늘 경계한다 말할 것도 없으니, 자기가 스스로 자신(自信)한 뒤에는 곧 어지럽힐 수 없다.
6. 만물이 한 몸이라 이르는 까닭은 모두 이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저기서 왔으니, "낳고 낳음을 역(易)이라 한다." 낳으면 일시에 낳아 모두 이 이치를 갖춘다. 사람은 능히 미루나 물(物)은 기운이 어두워 미루지 못한다. 그러나 그 물도 함께 갖추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이 다만 스스로 사사로워 자기의 몸뚱이 위에서 뜻을 일으키므로, 도리를 작게 보아 그것을 작게 여긴다. 이 몸을 놓아 모두 만물 가운데 두고 한가지로 보면 크나큰 쾌활이다. 석씨는 이를 알지 못해 그 몸 위에서 뜻을 일으키니, 그 몸을 어찌하지 못하므로 도리어 싫어하고 미워한다. 근진(根塵)을 다 없애려 하나 마음의 근원이 정해지지 못하므로, 마른 나무와 죽은 재(枯木死灰)처럼 되려 한다. 그러나 그런 이치가 없다. 이런 이치를 두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 석씨는 실은 몸을 사랑하여 놓지 못하므로 그처럼 많은 말을 한다. 비유컨대 짐을 진 벌레가 이미 들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다시 물건을 몸에 취하는 것과 같고, 또 돌을 안고 물에 뛰어들면서 그 무거움으로 더욱 잠기면서도 끝내 돌을 내려놓을 줄 모르며, 오직 무거움만 싫어하는 것과 같다.
7. 어떤 사람이 도기(導氣, 도인술)를 말하는 자가 있어 선생에게 묻기를, "선생께도 술법이 있습니까?" 이르기를, 나는 일찍이 "여름에는 갈옷 입고 겨울에는 갖옷 입으며,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신다." "기욕을 절제하고 심기(心氣)를 안정시킨다." 이와 같을 따름이다.
8. 불씨(佛氏)는 음양·주야·사생·고금을 알지 못하니, 어찌 형이상자(形而上者)가 성인과 같다 이를 수 있겠는가?
9. 석씨의 설은, 만약 그 설을 궁구하여 취사하려 하면 그 설을 궁구하기도 전에 진실로 이미 교화되어 부처가 된다. 다만 우선 자취(迹) 위에서 상고하라. 그 가르침을 세움이 이와 같으면 그 마음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진실로 그 마음을 취하고 그 자취를 취하지 않기는 어렵다. 이 마음이 있으면 이 자취가 있다. 왕통(王通)이 마음과 자취의 갈림(心跡之判)을 말한 것은 곧 어지러운 말이다. 그러므로 우선 자취 위에서 성인과 합하지 않음을 단정하느니만 못하다. 그 말에 합하는 곳이 있으면 우리 도에 진실로 이미 있는 것이요, 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진실로 취하지 않는 바이다. 이와 같이 정해 두면 도리어 간이하다.
10. 신선(神仙)의 설이 있는가를 물었다. 이르기를, 만약 대낮에 날아오른다는 따위를 말하면 없다. 만약 산림 사이에 거하여 형체를 보존하고 기운을 단련하여 수명을 늘리고 더한다 말하면 그것은 있다. 비유컨대 한 화로의 불을 바람 가운데 두면 쉬이 사그라지고 밀실에 두면 사그라지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 이런 이치는 있다. 또 양자(揚子)가 "성인은 신선을 스승 삼지 않으니 그 술법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함을 물었다. 성인이 능히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이르기를, 이는 천지 사이의 한 도적이다. 만약 조화의 기틀을 훔치지 않으면 어찌 수명을 늘릴 수 있겠는가? 가령 성인이 즐겨 하려 했다면 주공·공자가 했을 것이다.
11. 사현도(謝顯道)가 불교의 설과 우리 유가가 같은 곳을 두루 들어 이천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이 이르기를, 그처럼 같은 곳이 비록 많으나 다만 그 본령(本領)이 옳지 않으니 일제히 어긋나 버린다.
12. 횡거 선생이 말하였다. 석씨는 천성(天性)을 망령되이 헤아려 천용(天用)을 범위(範圍)할 줄 모르고, 도리어 육근(六根)의 미세함과 인연(因緣)으로 천지를 밝히려다 다하지 못하니, 곧 천지와 일월을 환망(幻妄)이라 무고한다. 그 쓰임을 한 몸의 작음에 가리고 그 뜻을 허공의 큼에 빠뜨린다. 이것이 큼을 말하고 작음을 말함에 흘러 달아나 중(中)을 잃는 까닭이다. 그 큼에 지나침은 육합(六合)을 티끌과 겨자로 여김이요, 그 작음에 가림은 인간 세상을 꿈과 환상으로 여김이다. 이를 이치를 궁구함(窮理)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이치를 궁구할 줄 모르면서 성(性)을 다한다(盡性) 이를 수 있겠는가? 알지 못함이 없다 이를 수 있겠는가? 육합을 티끌과 겨자로 여김은 천지를 다함이 있다 함이요, 인간 세상을 꿈과 환상으로 여김은 그 좇아 온 바를 궁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3. 위대한 역(大易)은 유무(有無)를 말하지 않는다. 유무를 말함은 제자(諸子)의 비루함이다.
14. 부도(浮圖, 불교)는 귀신을 밝힌다 하여, 의식 있는 자가 죽으면 생(生)을 받아 순환한다 한다. 마침내 괴로움을 싫어하여 면하기를 구하니, 귀신을 안다 이를 수 있겠는가? 인생을 망령됨(妄)이라 여기니 사람을 안다 이를 수 있겠는가? 하늘과 사람이 한 물(物)인데 문득 취사(取捨)를 내니, 하늘을 안다 이를 수 있겠는가? 공자·맹자가 이른바 하늘(天)은 저들이 이른바 도(道)이다. 미혹된 자가 "떠도는 혼이 변함(遊魂爲變)"을 가리켜 윤회라 하니,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대학(大學)은 마땅히 먼저 천덕(天德)을 알아야 한다. 천덕을 알면 성인을 알고 귀신을 안다. 지금 부도가 그 요체를 지극히 논함에 반드시 사생(死生)이 유전(流轉)하여 도를 얻지 않으면 면치 못한다 하니, 이를 도를 깨달았다 이를 수 있겠는가? 그 설이 중국에 성히 전해진 이래로, 유자가 미처 성학(聖學)의 문장(門墻)을 엿보기도 전에 이미 끌려 들어가, 그 사이에 빠져 가라앉아 큰 도라 가리킨다. 그 풍속이 천하에 통달하여, 선악과 지우(知愚), 남녀와 노복(臧獲)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다 믿게 한다. 영재(英才)와 기개 있는 자로 하여금 태어나면 이목이 편안히 익은 일에 빠지고, 자라면 세상 유자가 숭상하는 말을 스승 삼게 한다. 마침내 어둑하게 몰려가, 이로 인해 성인은 닦지 않고도 이를 수 있고 큰 도는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다 한다. 그러므로 아직 성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 이미 그 자취를 구할 필요가 없다 하고, 아직 군자의 뜻을 보지 못하면서 이미 그 글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한다. 이것이 인륜이 살펴지지 못하고 만물이 밝혀지지 못하며 다스림이 소홀해지고 덕이 어지러워지는 까닭이다. 이단의 말이 귀에 가득하고, 위로는 그 거짓을 막을 예가 없고 아래로는 그 폐단을 상고할 학문이 없다. 예부터 치우치고 음란하며 사악하고 회피하는 말이 한꺼번에 일어나, 한결같이 불씨(佛氏)의 문에서 나온 지 천오백 년이다. 만약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고 정밀하고 한결같이 스스로 믿으며 크게 남보다 뛰어난 재질이 있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그 사이에 바르게 서서 그와 더불어 시비를 따지고 득실을 헤아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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